▲ 노무현 대통령이 2월 22일 청와대에서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함께 만찬장으로 향하고 있다. 이날 노 대통령이 꺼내든 탈당카드는 향후 정국 운영부터 대선구도에 이르는 복합적인 노림수를 담고 있다는 관측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은 탈당 이유로 열린우리당 내 일각에서 제기돼 온 대통령 당적정리 주장과 연말 대선과 관련한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 차단을 들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 등 야권은 ‘기획 탈당’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고 정치권 관계자들도 노 대통령이 탈당카드를 꺼내든 이면에는 또 다른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거라고 보고 있기도 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마침내 홀로서기를 선언하며 대선정국에 뛰어들었다고 보고 있다. 이제 노 대통령이 최후에 쓸 수 있는 카드는 임기단축 정도만 남아있다는 것이 정설로 그 가능성도 앞으로의 정국 상황에 따라서는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보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서 나돌고 있는 노 대통령 탈당 이면에 숨겨진 노림수를 추적해 봤다.
노 대통령의 당적 정리 입장 표명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곳은 한나라당이다. 노 대통령이 당적을 정리하는 순간 열린우리당은 집권당 자격을 상실하게 되고 여당과 내각의 정책조율 시스템인 당정협의도 사라지게 된다. 정부는 원내 1당인 한나라당과의 정책조율을 통해 주요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열린우리당 탈당 사태로 의회 권력을 장악한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싫든 좋든 노 대통령과 후반기 국정운영 파트너가 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코드와 혈액형이 다른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에 적극 협력할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민생과 서민경제, 외교안보 사안 등 민감한 현안문제까지 ‘나 몰라라’ 외면하는 것 또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협력하자니 노 대통령의 전략에 휘말리는 것 같고 애써 외면하자니 역풍이 우려되고 이래저래 난처한 입장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노 대통령의 당적 정리 입장을 접한 한나라당 유기준 대변인이 22일 “민생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정권 재창출에만 전념하겠다는 대국민 협박이고 국정실패 책임을 야당에게 떠넘기면서 통합신당의 길을 터 주려는 기획탈당”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한 배경에는 한나라당의 복잡한 속사정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의 탈당 이면에는 고도의 복합적인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우선은 한나라당을 끌어들여 일정한 책임을 나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탈당 후 민생과 대선 중립을 명분으로 한나라당에 국정협조를 집요하게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소신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는 개헌안도 임시국회 종료(3월 6일) 직후 발의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개헌안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발의될 경우 국회는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고 원내 1당인 한나라당은 처리에 적잖은 정치적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부동산 정책이나 대북 정책, 한미 FTA,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문제 등 민감한 현안문제와 관련해 각 정당의 협조나 지지를 받지 못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 경우 이를 명분으로 임기단축 등 마지막 승부수를 띄울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 22일 청와대 만찬에서 한명숙 총리와 악수하는 노 대통령. | ||
실제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중도파 문희상 의원은 22일 민주당과의 선 통합론을 제기해 그 배경에 정가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문 의원은 이날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이제는 때가 왔다. 직설적이고 공개적, 우선적으로 민주당과의 통합을 제안해야 한다”며 “이제는 ‘도로 민주당’이란 항간의 비아냥거림과 비난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의 당적 정리 입장에 때를 맞춰 약속이라도 한 듯 민주당과의 통합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DJ정부 시절 실세였던 동교동계 인사들도 22일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모임을 갖고 세력 규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분위기다. 참석자들은 권노갑 전 고문과 박지원 전 실장, 설훈 전 의원의 특별사면복권을 축하하기 위한 모임이라며 정치적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이날 회동 자리에 한화갑 민주당 전 대표, 정균환 민주당 부대표, 김홍일 김옥두 김태식 박주선 전 의원 등 동교동계 핵심인사들이 대부분 모였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이들이 범여권 통합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DJ도 최근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범여권 인사들에게 범여권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차남인 김홍업 씨는 4월 재보선에 범여권 연합후보로 출마할 것이란 관측도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노 대통령의 측근이자 DJ정부 시절 정무수석을 지낸 문희상 의원이 민주당과의 선 통합을 주장하고 있는 배경에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노 대통령과 DJ는 물론 동교동계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문 의원이 이들 핵심 인사들과의 사전 교감속에 노 대통령과 DJ를 매개로 한 범여권 새판짜기 플랜을 주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노 대통령이 충청 표심을 다잡기고 불리한 대권판세를 뒤집기 위한 대선전략 차원에서 탈당카드를 꺼내들었을 것이란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사퇴 명분이 없었던 한명숙 총리에게 당 복귀와 함께 대권경쟁에 참여할 명분을 주고 중립적인 충청 출신 인사를 차기 총리로 입각시켜 충청표심을 끌어안겠다는 포석이 깔려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한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이후 청와대는 비정치인, 비호남, 비영남 등 소위 ‘3비 원칙’에 입각한 차기총리 인선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 총리론을 부각시키기 위한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주변에선 벌써부터 충청 출신인 김우식 부총리겸 과기부 장관과 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이와 관련, 친노직계인 L 의원은 22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지난 대선 때 노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사실상 충청권과 정책연대를 이끌어 내는 성과를 일궈낸 적이 있다”며 “이번 대선도 결국 충청 표심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충청 표심을 끌어안기 위한 차원에서 충청 출신 인사를 차기 총리로 인선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의 탈당과 함께 당 복귀를 선언한 한명숙 총리의 향후 정치 행보도 관심사다. 한 총리 역시 범여권 차기주자들과 마찬가지로 바닥권 지지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본격적인 대권행보를 걷게 될 경우 대선구도에 적잖은 변수가 될 것이란 시각도 적지 않다.
실제로 청와대 핵심관계자들은 한 총리가 범여권 대권레이스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정치적 시너지 효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성인 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 유력 주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반면 범여권은 여성주자가 전무한 상황이다. 따라서 한 총리가 대권경쟁에 뛰어들 경우 이른바 ‘박근혜 대항마’로 일정 역할을 할 수 있을뿐더러 범여권 대선 경선을 흥행시킬 수 있는 장밋빛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게 청와대의 시각이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지난 연말 이후 노 대통령과 한 총리가 잦은 회동을 통해 대권과 관련한 모종의 교감을 나눴을 것이란 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이 연말 대선을 겨냥한 대권전략 차원에서 탈당을 결심했는지 여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다만 노 대통령의 성격이나 정치스타일에 비춰볼 때 그가 몇 개 남지 않은 비장의 승부수를 꺼내든 배경에는 정치적 노림수 등 다목적 전략이 함축돼 있을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