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권 대권주자들을 중심으로 한 통합신당 주도권 싸움이 대권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듯한 형국이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과 구여권 수뇌부의 잘 짜 맞춘 대권 각본에 따라 범여권을 망라한 제 세력들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란 의혹을 여전히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범여권이 정권 재창출을 목표로 이른바 ‘맞춤형 후보 띄우기’ 극비 플랜이 조직적으로 가동되고 있을 것이란 관측도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후보 연합도 벌써 수면 위에서 논의되고 있다. 범여권의 대권후보 찾기 움직임을 살펴본다.
최근 범여권의 움직임은 한마디로 선 주자다각화 전략이다. 한자리수 지지율의 주자들만 있을 뿐 극심한 인물난에 시달리고 있는 범여권으로서는 우선 주자들을 다양하게 개발해 국민들의 관심도 끌어 지지율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한나라당 후보에 맞설 인물을 골라내자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의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맞춤형 대권후보 띄우기’ 플랜이다. 한마디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 이른바 한나라당 ‘빅3’와 일 대 일로 ‘맞짱 승부’를 펼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범여권 후보를 치밀하게 만들어 낸다는 게 복수의 범여권 핵심 관계자가 전하는 플랜의 골자다. 한나라당 3명 중 누가 최종 후보로 나오더라도 그 후보와 각각 맞대결을 벌일 후보군을 범여권 대권레이스에 참여시킨 다는 것이 플랜의 목표다. 이를 통해 경선 과정에서는 범여권에도 한나라당 인물군에 필적할 인물이 있음을 널리 알리고 한나라당 경선 결과에 따라서는 준비된 대응 후보를 중심으로 범여권 단일대오를 구축한다는 전략이다.
정치권이 보는 범여권 ‘맞춤형 후보 띄우기’ 플랜의 핵심 인물은 정운찬 전 총장과 한명숙 전 총리다. 정 전 총장이 신당모임의 김한길 의원을 만나 대선출마 여부를 조율한 것이나 당으로 복귀한 한 전 총리가 본격적인 대권행보를 준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플랜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거론되는 것이 바로 ‘경제 대통령론’의 이명박 대 정운찬, ‘여성 대통령론’의 박근혜 대 한명숙의 구도이며 나아가 ‘개혁 대통령론’이라면 손학규 대 천정배 구도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8일 의원회관에서 기자와 만난 A 의원은 “정 전 총장과 한 전 총리는 결국 범여권 대권레이스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며 “두 사람의 참여는 위축된 범여권 대선경선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흥행카드이자 여러 면에서 한나라당 후보들과 맞대결을 벌일 수 있는 역량과 경쟁력을 두루 갖춘 훌륭한 후보”라고 말했다. 범여권 내에서 유능한 선거 기획통으로 통하는 A 의원은 ‘범여권 세력이 두 사람을 전략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통합신당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제 세력들이 중지를 모아 특정 후보를 지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면서도 “하지만 범여권 통합과 정권재창출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누구를 내세워야 할지는 다들 익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상당수의 범여권 통합세력이 여권 통합과 한나라당 집권을 막을 수 있는 대안으로 정 전 총장과 한 전 총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열린우리당을 비롯해 신당모임과 민주당 등 범여권 통합세력들은 오래전부터 정 전 총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영입 경쟁을 펼치고 있고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당으로 복귀한 한 전 총리 띄우기에 전력투구를 하고 있다.
8일 기자와 만난 범여권의 또다른 핵심 관계자 B 의원은 ‘맞춤형 후보 띄우기’ 플랜과 관련해 “사분오열되고 있는 범여권 상황을 감안하면 당장 통합 후보를 만들어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결국에는 ‘반 한나라당’ 전선으로 다시 뭉치지 않겠느냐”며 “범여권 예비 잠룡인 정운찬 한명숙 천정배는 각각 ‘한나라당 빅3’인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의 대항마로 손색이 없는 주자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B 의원은 또 “한나라당 후보가 결정되면 누가 대항마로 나서야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를 놓고 각각의 통합세력들과 대권주자들이 고민을 하게 될 것이고 합리적인 결과물을 내놓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단일후보 추대가 어려울 경우 유력 후보간 전략적 연대 등을 통해 필승전략을 도출해 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측면에서 맞춤형 후보 띄우기와 함께 범여권 통합세력 일각에서 유력 후보간 연대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필승전략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호남과 충청권을 묶는 ‘정동영-정운찬 조합’, 호남과 영남 표심을 겨냥한 ‘천정배-김혁규 조합’, 한나라당 후보들의 연대를 겨냥한 ‘정운찬-한명숙 조합’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정동영-정운찬 조합’은 친정동영계로 분류되고 있는 김한길 의원과 정 전 총장이 회동한 사실이 알려진 이후 급부상한 연대론이다. 두 사람은 회동 내용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열린우리당을 배제한 통합신당 추진’에 교감을 나눴다는 사실과 정 전 총장이 대권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점에 정치권은 주목하고 있다. 특히 정치권 일각에선 김 의원이 정동영 전 의장과 가깝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대권 입지가 약화되고 있는 정 전 의장과 신당모임이 정 전 총장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치적 빅딜을 제안했을 것이란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정 전 의장과 뜻을 함께하는 신당모임과 민주당이 통합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 호남권 지분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정 전 총장은 4월 재보선 때 충청권 맹주를 노리고 있는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를 지원해 충청권 민심을 다잡은 다음 정 전 의장과 정 전 총장을 정점으로 한 호남-충청 연대를 도모하자는 의견을 주고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3월 말을 전후로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2차 대규모 탈당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측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신당모임(23석)과 민주당(11석), 국중당(5석)이 선통합을 하고 정 전 의장을 중심으로 한 추가 탈당세력이 합세할 경우 60석 안팎의 중형급 신당이 태동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천정배-김혁규 조합’은 호남과 영남을 아우르는 국민대통합형 카드로 친노그룹이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친노사단으로 분류됐던 천정배 의원이 선도 탈당을 결행한 후 민생정치모임을 이끌며 범여권 개혁세력 결집에 앞장서고 있는 배경에는 친노그룹의 대권전략이 투영돼 있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실제로 지난 7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천 의원의 출판기념식에 정세균 의장과 장영달 원내대표, 김근태 전 의장, 정대철·조세형 고문 등 열린우리당 전·현직 중진들이 대거 참석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무늬만 탈당파지 천 의원이 지향하고 있는 통합신당의 방점은 여전히 친노그룹과 뜻을 함께하고 있을 것이란 말이 나돌 정도다.
PK(부산 경남)지역을 대표하는 친노 중진인 김혁규 의원도 대선출마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호남 출신이지만 수도권에 지역구(경기 안산단원 갑)를 두고 있는 천 의원과 PK지역의 터줏대감인 김 의원이 나란히 대선에 출마해 힘을 합칠 경우 영호남은 물론 수도권까지 아우르는 이상적인 국민통합형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친노그룹은 기대하고 있는 분위기다.
‘정운찬-한명숙 필승카드’는 ‘맞춤형 후보 띄우기’ 플랜과 맞물려 구여권 수뇌부가 지원하고 있고 상당수 범 여권 통합세력들이 동조하고 있는 만큼 현실성 있는 카드로 부상하고 있다. 정 전 총장과 한 전 총리는 각각 이명박 전 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가 갖추고 있는 경제 마인드와 여성리더십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이 ‘연합 후보’라는 최강 카드를 꺼내들었을 경우에도 그 대안 카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가 소식통들은 탈당한 노무현 대통령도 맞춤형 후보나 후보 연합 등 소위 후보 다각화 플랜에 일정부분 교감하고 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범여권 대권주자 중 누가 대권을 거머쥐든 상관이 없다는 복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게 이들 소식통들의 시각이다. 노 대통령이 8일 ‘조건부 개헌 발의 유보’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개헌카드로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탈당카드로 스스로 ‘여권’이란 정치적 버팀목을 없앤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 후보들을 직접 겨냥하는 고도의 공중전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즉 ‘한나라당 빅3’는 내가 견제할 테니까 범여권 후보들은 몸값 끌어올리기 등 마음껏 지상전을 펼치라는 노 대통령의 대권 복심이 깔려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조건부 발의 유보’를 주장한 이면에는 고도의 대권전략이 숨겨져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8일 유기준 한나라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대선 주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한나라당의 유력 주자들을 흠집내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며 “정략적 음모 차원의 개헌안 발의는 즉각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고위 관계자도 “재집권을 노리고 있는 노 대통령과 구여권 수뇌부가 치밀한 사전 교감하에 한나라당 말살 음모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며 “범여권 세력들이 갈등 양상을 보이면서도 한 목소리로 통합을 외치고 있는 것은 국민을 속이고 새 살림을 차리기 위한 고도의 대권 술책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는 꼴”이라고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