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희 총장이 사퇴한 19일 이화여대 학생들이 ‘해방이화’ 피켓을 들고 본관 앞을 가득 메웠다. 박정훈 기자
[일요신문] ‘최순실 게이트’의 한복판에 선 이화여대가 뒤숭숭한 모습이다. 최 씨 딸 정유라 씨를 둘러싸고 각종 의혹이 불거지면서 연일 지탄을 받고 있다. 10월 19일엔 개교 이후 처음으로 교수들이 총장 사퇴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최경희 총장이 물러났지만 이화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다. <일요신문>이 이화여대를 직접 찾았다.
10월 17일 방문한 이화여대엔 무거운 기운이 돌았다. 정문에 들어서자 졸업생들이 반납한 졸업증명서가 눈에 띄었다. 정문 구석에선 ‘정유라 특혜 의혹 규명과 총장 해임을 위한 강력한 행동’ 등을 요구하기 위한 학생총회 발의서명이 진행 중이었다. 건물 곳곳엔 수많은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비선 실세 논란을 야기한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정 씨와 함께 의류학과 수업을 들었다던 한 학생의 대자보가 눈길을 끌었다. 의류학과 16학번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정 씨와 같은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다. 노력 끝에 얻게 된 학점을 정 씨는 어떻게 수업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최소 B 이상을 챙겨갈 수 있었나. 수업 시간에도 교수가 정 씨를 보고 ‘자동 F 학점에 이를 정도로 결석 횟수가 차서 얘는 이미 F다’라고 말을 했다”고 했다. 이 학생을 수소문했지만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 직접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풍문만 들려올 뿐이었다.
쏟아지는 관심과 뜨거운 취재 열기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일요신문>이 만난 학생들 대부분 “모른다”며 인터뷰를 꺼렸다. 정유라 씨와 관련된 질문을 하자 반감을 드러내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학생은 취재진과의 대화를 녹음하기도 했다.
한 학생은 “많은 학생들이 오늘 비공개 질의응답회에 참석한다. 1학년까지 참석하는데 열의가 대단하다”고 귀띔했다. 17일은 학교 측이 교직원과 학생을 대상으로 비공개 질의응답회를 가진 날이었다.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까지 논란이 됐는데 정 씨가 아직 학교에 재적하고 있다. 학교 명예가 달린 문제인 만큼 자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교수들도 움직였다. 교수협의회가 “학사 운영 상황에 문란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며 10월 19일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이다. 교수들이 집단 시위를 벌인 것은 개교 이래 처음이었다. 시위 직전 최 전 총장은 “이화가 더 이상 분열의 길에 서지 않고 다시 화합의 신뢰로 아름다운 이화 정신을 이어가자는 취지에서 총장직 사임을 결정하게 됐다”며 사퇴를 선언했다.
김혜숙 교수협의회장은 “교수 시위 내용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 안(총장 사퇴)이 받아들여졌다. 박근혜 정부의 추악한 부분과 여러 비리 의혹에 대해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 볼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에 있던 많은 학생들의 호응을 받은 부분이었다.
본관 앞에 있는 학생들 중에선 “눈물 난다”며 울먹거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어 본관을 점거한 학생들이 줄 지어 나왔다. 선두에 선 학생은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서로 “끝났다” “괜찮다”며 토닥거렸다. 한 교수는 일일이 학생들을 안아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성명서 낭독과 질의응답이 끝나자 어느새 학생들이 본관을 완전히 메웠다. 교수들이 행진 선두에 나서자 학생들은 연신 “교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학생들이 교수를 따라 행진대열에 합류하자 “학사 문란 책임져라”라는 구호가 교내에 울려 퍼졌다. 약 한 시간을 넘겨 행진이 끝이 났다.
이화여대의 한 교수는 “솔직히 최순실 사태를 보면서 제자들 앞에 서기가 부끄러웠다. 학생들이 우리 시위현장에서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정치적인 교수들 때문에 학교가 이 지경까지 왔다. 총장이 물러나긴 했지만 향후 진상 조사 결과 등을 지켜본 후 추후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 재학생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사태가 커질 줄 몰랐다. 총장이 사퇴해 다행이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은 “학교가 자꾸 언론에 오르내리니 부끄럽다. 의혹들에 대해 진상 규명이 이뤄지고 빨리 명문 사학의 타이틀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이대 교수비상대책위원회는 “학생들이 농성을 마치고 명예롭게 학교생활을 복귀할 수 있도록 안전을 보장하고 학내 구성원의 의사를 반영하는 합리적인 총장 선출제도를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앞서의 김 교수협의회장은 “언론에 나온 의혹을 중심으로 학교 해명과 얼마나 차이 나는지 지켜 볼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