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씨가 10월 31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됐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이번 수사가 검찰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갈수록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최순실 씨의 전방위 국정개입 의혹에 대해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단일 사건에서 ‘조직의 미래’가 언급될 정도로 검찰 내부에선 위기감이 팽배하다. 앞서의 검찰 고위 관계자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의지로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 뒤늦은 수사에 불신 여론 “당황한 검찰”
최근 몇 달 새 검찰에선 전‧현직 검찰 간부 출신들이 연루된 비위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68년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검사장 구속이라는 기록을 낳은 ‘진경준 사건’으로 인해 조직 전체가 비판을 피하지 못했고, 지난 8월 말 대구고검장이 팀장을 맡아 시작한 ‘우병우·이석수 수사’와 관련해서는 “수사 내용이 수사 대상인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보고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일각에선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서도 검찰에 대한 불신과 비판의 목소리를 검찰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 씨에 대한 의혹이 불거진 뒤 법조계 안팎에선 “언론이 검찰 대신 수사하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지난 9월 20일 최 씨의 실명이 포함된 의혹 보도가 나온 뒤 한 시민단체는 같은 달 29일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을 댄 대기업과 안종범 대통령정책조정수석비서관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법조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당시만 해도 검찰 내부에서는 기업인들이 ‘강제로 돈을 뺐겼다’고 진술할 리 없는 만큼 구체적 혐의 적용이 쉽지 않다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실제로 고발장이 접수된 지 일주일 뒤인 지난 10월 5일,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배당했다. 형사8부는 통상적인 고발 사건을 처리하는 부서다. 최근까지 검찰은 대기업 비리 수사에서 200명이 넘는 검찰 인력을 투입해왔다. 지난 6월 서울중앙지검은 롯데그룹 비리 수사에서 3차장 산하 인지 부서 3곳을 동원해 검사 및 수사관 240여 명을 압수수색에 투입했다.
대우조선해양 수사에 착수한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 역시 200여 명의 검찰 요원을 압수수색에 투입했다. 이를 두고 법조계 안팎에선 “마치 군사작전 같다”는 말이 나올 만큼 검찰은 핵심 증거를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인력을 한꺼번에 투입했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형사8부에 배당된 이후에도 검찰은 한 달 동안 압수수색을 단 한 번도 진행하지 않는 등,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언론이 중요 자료를 확보해 보도했고, 이로 인해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압수수색이 너무 늦었다” “몸통을 밝히기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등의 지적이 나온 건 이때부터다. 이와 함께 정치권에서 ‘특별검사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면서 검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어떻게 보든 수사 의지 높아”
지난 10월 31일 잠적했던 최 씨가 검찰에 자진 출두한 이후부터 검찰 수사는 현재 급물살을 타고 있다. 관련자들을 줄줄이 소환 조사하면서 상당한 진술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이 처한 상황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일각에선 대통령이 지난 4일 대국민 담화에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히면서 검찰의 ‘정치적 부담감’은 다소 줄었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법조계 안팎에선 검찰의 딜레마는 여전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초동의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정치권과 국민 모두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수사결과를 보장하기 어려워 어떤 결과가 나오든 현재 정치권에서 격론을 벌이고 있는 특별검사제 도입은 피해가기 힘들 것”이라며 “특검이 도입되면 대검 중수부를 뛰어넘는 규모로 꾸린 특별수사본부뿐만 아니라 검찰 조직 자체가 엄청난 비판과 후폭풍에 휩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 보도가 검찰 수사를 앞서가고 있는 상황도 검찰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의혹만 가지고 수사를 할 수 없는 데다 구체적인 범죄 혐의 소명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는 만큼 “수사 속도가 더디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 이에 대해 한 검찰 관계자는 “검찰에 대한 여론의 목소리를 조직을 위한 ‘조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외부에서 어떻게 보든 특수본은 수사 의지가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 대통령 수사 가시화 “눈치 볼 것 없다”
검찰이 넘어야 할 벽은 또 있다. 지난 3일 이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조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헌정 사상 처음이다. 현직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받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 한 번도 수사 대상에 오른 적이 없다.
검찰 수사가 급물살을 탄 직후에도 검찰은 “대통령 조사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최근 최 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법조계에선 대통령이 의혹의 핵심에 설 수밖에 없으며,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최 씨와 안 전 수석의 검찰 진술 내용과 태도도 검찰이 대통령 조사 의견에 힘을 싣는다. 객관적인 증거들이 일부 드러난 상황에서 “모른다” “아니다”라며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두 사람의 진술로 인해 결국 사건의 진상을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에게 ‘재단 설립 지시’의 구체적 목적은 물론 최 씨가 이 일에 끼어들게 된 경위 등을 물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서초동의 또 다른 검찰 출신 변호사는 “대통령이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힌 마당에 검찰이 눈치 볼 일이 더 있겠느냐”며 “대통령 측근 수사 과정에서부터 대통령 조사를 염두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검찰은 내부적으로 대통령 조사 시점과 방식을 놓고 실무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면조사 가능성이 높지만, 일각에선 조사 내용이 방대해 청와대 방문 조사 의견도 나온다고 한다. 조사 시점은 최 씨와 안 전 수석, 정호성 전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 등의 기소가 이뤄지는 11월 중순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법조계의 관측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