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가 그 정도다. 2006년 타격 트리플 크라운(타율·홈런·타점 1위)에 올랐고, 2011년에는 트리플 크라운을 포함해 전무후무한 타격 7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던 타자다. 2010년에 남긴 9경기 연속 홈런 기록 역시 아직 범접할 선수가 없다. 2012년 일본에 진출한 뒤에도 오릭스와 소프트뱅크에서 4번 타자로 활약했고, 지난해에는 메이저리그 시애틀에서 존재감을 충분히 뽐냈다.
이미 부산도 들썩거리고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사직구장이 다시 응원 열기로 뜨거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선수 한 명이 복귀한 효과가 이렇게 크다. KBO리그는 최근 몇 년간 특급 선수들의 잇단 해외 진출로 스타플레이어 기근에 시달려왔다. 이대호의 국내 복귀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다.
이대호는 수십억 원을 더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고향팀 롯데로 돌아왔다.
150억 원 가운데 계약금만 50억 원이다. 4년 동안 매해 25억 원의 연봉을 받는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를 아우른 한국 4대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역대 최고 연봉이다. 지난해 KBO리그 최고 연봉은 한화 김태균이 받은 16억 원이었다. 동갑내기인 이대호가 그 금액을 9억 원 더 올렸다. 올해 200만 달러 벽을 깨고 역대 외국인 선수 최고액(210만 달러)에 계약한 두산 더스틴 니퍼트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호의 몸값을 둘러싼 논란은 전혀 불거지지 않는다. “FA 시장에 거품이 너무 많이 꼈다”고 걱정하던 세간의 시선도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이대호가 돈보다 고향팀에 대한 애정을 택했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 주인공이 ‘이대호’라서다.
이대호는 일본에서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선수였다. 2014년과 2015년 2년간 소프트뱅크에서 합계 12억 5000만 엔을 받았다. 롯데와의 4년 계약 금액과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이대호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외국인 타자가 올해 소프트뱅크와 계약하면서 3년 15억 엔에 사인했다. 이대호는 이보다 더 큰 금액의 계약도 가능했다.
실제로 시애틀과의 계약이 끝난 뒤 일본 구단에서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았다. 롯데가 준 돈보다 수십억 원은 더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이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고향팀 롯데로 왔다. “일본과 미국에서 모두 뛰겠다는 꿈을 이뤘으니, 이제 롯데로 돌아와 팀 동료, 후배들과 함께 우승을 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는 뜻에서다. 롯데도 이대호에게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 해외 리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대호는 정든 고향과 팀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길을 택했다.
실제로 고향팀, 혹은 친정팀에 대한 선수들의 애정은 예상보다 더 크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빅리그에 동양인 최다승 기록을 남긴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미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 1년을 고향 공주의 연고 지역팀인 한화에서 장식했다. 한국의 야구팬들은 한국 야구의 자부심을 큰 무대에 널리 알린 박찬호의 마지막 한 시즌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FA가 돼 각각 일본과 미국으로 떠났던 한화 김태균과 KIA 윤석민 역시 국내로 복귀하면서 해외 진출 전 몸담았던 소속팀으로 돌아왔다. 광주일고 동문인 ‘컨트롤 아티스트’ 서재응과 ‘빅초이’ 최희섭이 고향팀 KIA에서 다시 함께 뛰는 모습은 그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만큼이나 광주 팬들에게 큰 기쁨을 안겼다.
올해 이승엽은 고향팀 삼성에서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을 뛴다.
올해의 이대호만큼 야구계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킨 복귀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타자로 꼽히는 ‘라이언킹’ 이승엽의 삼성 복귀가 어깨를 견줄 만하다. 이승엽은 2011년 10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2004년 일본 무대로 진출한 뒤 8년 만이었다. 그는 2003년에 아시아 한 시즌 최다 기록인 홈런 56개를 쳤다. 국내에 더 이상 적수가 없었다. 그해를 끝으로 FA 자격을 얻었고, 한국 무대의 영광을 뒤로 하고 일본 프로야구 도전을 택했다.
2004년 지바롯데에 입단한 뒤 2005년 30홈런을 때려내면서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6년에는 일본 최고 명문 구단 요미우리로 이적해 ‘거인 4번 타자’ 계보를 이었다. 이적 첫 해인 2006년 성적이 타율 0.323, 홈런 41개, 108타점. 최고의 전성기였다. 요미우리와 4년 30억 엔이라는 초대형 계약을 맺은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후 부상과 부진이 겹쳐 그 이상의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다. 2011년 오릭스로 이적하고도 평범한 성적을 올린 뒤 국내 복귀를 선택했다. 오릭스와의 계약이 1년 더 남아 있었지만, 1억 5000만 엔이라는 연봉을 포기하고 일본을 떠났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 영욕의 8년이었다.
이승엽은 이대호와 마찬가지로 당시 신생팀이던 NC를 제외한 나머지 8개 구단 모두와 계약할 수 있는 FA 신분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삼성 유니폼을 입지 않은 이승엽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당시 삼성 지휘봉을 잡고 있던 류중일 감독의 의지가 강했다. “이승엽이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팀에 돌아와 힘이 됐으면 좋겠다. 한국 프로야구 전체 인기에도 좋은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오릭스로 이적한 이승엽을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지에서 마주친 뒤 “승엽아, 삼성 올래?”라고 진담 섞인 농담을 건네는 장면이 큰 화제를 모았을 정도다.
삼성 역시 이승엽을 다른 팀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미 이승엽의 등번호 36번을 ‘예비 영구결번’으로 지정해놓은 상태였다. 이승엽이 일본으로 간 2004년부터 8년간 36번을 달았던 삼성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한화가 류현진(LA 다저스)의 등번호 99번을 비공식 영구결번으로 남겨놓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구단 역시 이승엽을 영입하기에는 여러 모로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당시 FA 규정에 따라 막대한 보상금을 지출해야 했다. 2003년 이승엽의 연봉 6억 3000만 원을 기준으로 보상 선수 1명과 18억 9000만 원(FA 직전 시즌 연봉의 300%), 혹은 순수 보상금 28억 3500만 원(FA 직전 시즌 연봉의 450%)을 내줘야 했다. 물론 이승엽에게 줘야 할 몸값은 별도다.
이승엽은 일본 생활을 접고 귀국하던 공항 인터뷰에서 “꼭 삼성에서 뛰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그리고 삼성과 이승엽은 1년 총액 11억 원에 사인하면서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갔다. 이승엽은 그 후로도 삼성의 얼굴이자 간판타자로 활약했다. 일본에서 뛰느라 못 다 이뤘던 기록들을 하나씩 바꿔나갔다. 올해 이승엽은 고향팀 삼성에서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을 뛴다.
추신수가 한국에서 한 시즌이라도 뛰게 된다면 그를 영입할 권리는 무조건 SK에 있다.
이대호가 국내 리그로 돌아오면서 이제 한국 프로야구 출신 현역 메이저리거는 5명으로 줄었다. LA 다저스 류현진, 피츠버그 강정호, 미네소타 박병호, 세인트루이스 오승환, 볼티모어 김현수다. 이들은 나이로나 기량으로나 아직 한창 메이저리그에서 뛸 시기다. KBO리그에서 다시 보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모두 팀의 간판이자 한국 프로야구의 중심으로 활약했기에 언젠가는 다시 볼 날을 기대하게 되는 선수들이다.
이들 가운데 국내 복귀 시 소속팀 선택이 자유로운 건 김현수 한 명뿐이다. 김현수는 풀타임 9년을 꽉 채우고 FA 자격을 얻어 미국으로 갔다. 돌아올 때는 원 소속팀 두산뿐만 아니라 모든 구단과 자유로운 협상이 가능하다. 류현진과 강정호, 박병호는 원 소속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외 진출 가능 시한인 7년을 뛴 뒤 구단의 동의를 얻어 포스팅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해외 구단 이적은 자유롭지만, 국내로 돌아오려면 둥지가 정해져 있다. 류현진은 한화, 강정호와 박병호는 넥센이다.
한국에서 8년을 뛰고 해외 무대에 진출했던 세인트루이스 오승환도 국내에서 현역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면 무조건 삼성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오승환은 단국대를 졸업하고 2005년 프로에 데뷔했다. 고졸 선수는 9년을 뛰어야 FA 자격을 얻지만, 대졸 선수는 8시즌을 소화하면 FA가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오승환도 여기에 해당한다. 단, 국내 구단 이적에 한해서다. 해외 구단과 계약하려면 대졸 선수도 고졸 선수와 똑같이 9시즌을 다 소화해야 한다. 7년과 8년을 뛴 선수는 최종 학력과 관계없이 구단의 허가가 필요하다.
오승환은 메이저리그가 아닌 일본의 문을 먼저 두드렸다. 한신이 삼성에 이적료를 지불하고 오승환을 데려갔다. 오승환은 한신에서의 2년 계약이 끝난 뒤 다시 지난해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와 계약했다. 훗날 KBO리그에 돌아오게 된다면 선택지는 삼성 하나다.
그렇다면 한국 프로야구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했던 텍사스 추신수는 향후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추신수는 부산고 출신이다. 고향 연고 지역 팀은 롯데다. 그러나 만약 그가 박찬호처럼 언젠가 한국에서 한 시즌이라도 뛰게 된다면, 그를 영입할 권리는 무조건 SK에 있다. 2007년 열린 해외파 특별지명회의에서 그렇게 결정됐다.
당시 롯데가 송승준, KIA가 최희섭을 먼저 지명한 상황에서 나머지 6개 구단이 선수 5명을 놓고 지명권 제비뽑기를 했다. 이때 1번 지명권을 뽑은 구단이 SK였다. SK는 드래프트에 나와 있던 선수 다섯 가운데 당시 클리블랜드 소속이던 외야수 추신수를 가장 먼저 지명했다. 이어 류제국이 LG, 이승학이 두산, 채태인이 삼성, 김병현이 현대의 선택을 받았다. 이때 지명된 선수 7명 가운데 국내 무대에서 뛰지 않은 선수는 추신수뿐. 유일하게 지명권을 뽑지 못한 한화 역시 5년 뒤 박찬호를 영입하면서 실질적인 혜택을 누렸다. SK에 훗날 ‘추신수 지명권’을 쓸 행운이 찾아올지 지켜볼 일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한신 ‘수호신’ 후지카와, 독립리그 찍고 친정 복귀 후지카와 규지(37)는 일본 프로야구 한신의 ‘수호신’으로 군림한 투수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 마무리 투수였던 오승환(세인트루이스)처럼, 불같은 힘을 지닌 직구가 그의 무기이자 상징이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공을 쥔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타자에게 ‘직구를 던지겠다’는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장면으로도 유명했다. 그 후 당당하게 삼진을 잡아내는 실력이 있었으니 그런 패기가 더 빛났다. 기록도 화려하다. 1999년 입단 후 2012년까지 한신에서만 뛰면서 통산 220세이브(42승 25패 포함), 평균자책점 1.77을 기록했다. 2007년 기록한 46세이브는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다. 대표팀에서도 활약했다. 2006년과 2009년 일본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에 힘을 보탰다. 한신은 물론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소방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프로 데뷔 13년 만인 2012년 시카고 컵스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서 너무 많은 공을 던지고 온 뒤였다. 입단하자마자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1년 뒤 복귀하고도 부상과 부진이 겹쳐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년 계약이 끝난 뒤 2014년 텍사스로 이적했지만, 다리 부상을 입어 5월에 방출됐다. 그런 후지카와를 내버려둘 한신이 아니다. 당시 한신에는 한국에서 온 특급 마무리 투수 오승환이 있었지만, 다시 후지카와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후지카와 역시 한신 복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후지카와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진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프로가 아닌 독립리그 시코쿠 아일랜드 소속 구단 고치 파이팅독스에 새 둥지를 튼 것이다. 고치는 후지카와 자신과 아내가 모두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고치 구단이 제의한 것도 아니라 후지카와가 먼저 입단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져 더 놀라움을 샀다. 그는 당시 자신의 공식 블로그를 통해 “미국과 일본 구단에서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고향인 고치에서 던지면서 미래의 슈퍼스타가 될 유망주들의 꿈을 지원하고 지역 야구 발전에 공헌하고 싶다”고 썼다.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온 선수가 일본으로 복귀하면서 독립리그로 간 역대 유일한 사례였다. 실제로 후지카와는 한 시즌을 고치 선수로 활약했다. 연봉도 받지 않고 무료로 뛰었다. 그리고 2015년 11월, 이번엔 다시 친정팀인 한신으로 돌아갔다. 4년 만에 다시 한신 유니폼을 입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한신에서 함께 뛰었던 가네모토 도모아키 감독이 취임하면서 다시 후지카와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후지카와는 눈물을 보이며 옛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한신으로 돌아갔다. 물론 성적은 과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한신팬들은 돌아온 후지카와를 뜨겁게 환대했다. 구단도 올해 후지카와가 없는 동안 오승환이 달았던 ‘소방수 번호’ 22번을 다시 돌려주면서 돌아온 ‘수호신’에게 힘을 실어줬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