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22일 독일 국회의사당 잔디에 경비행기가 추락해 소동이 일었다. | ||
이를 지켜본 베를린 시민들은 순간 ‘9·11 테러’의 악몽을 떠올리면서 베를린 심장부를 겨냥한 자폭 테러범의 소행이라는 둥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경비행기 추락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시민의 단순한 자살 사건으로 판명되었던 것.
그렇다면 그는 왜 자살 장소로 굳이 국회의사당 앞을 택했던 것일까. 그리고 또 자살은 왜 한 걸까.
그의 이름은 폴커 클라비터(39). 그는 베를린 근교인 에어크너에서 아내 크리스티안네(36)와 아들 다니엘(14), 딸 마리안네(12)와 단란하게 살고 있었으며, 동네에서도 평판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베를린 시청 청소과에서 쓰레기 수거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그는 주말에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정비하는 일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4년 전부터는 경비행기 조종에 심취해 있었으며, 틈만 나면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 인근 상공을 비행했다.
그러던 중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자살하기 5일 전인 월요일, 평소처럼 아침에 직장으로 출근을 했던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다른 데 있었다. 아내가 실종된 지 사흘이 지나도록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은 아내의 직장 동료였으며, 경찰의 탐문 조사 결과 월요일 이후 아내를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살해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 경찰은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남편인 클라비터를 올려놓았다. 그가 실종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아내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그였으며, 실종 당일 아침 아내를 직장까지 태워다 준 것 역시 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여러 차례 집을 찾아가 아내의 행방에 대해 물을 때에도 그는 “전혀 모른다”는 말로 일관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경비행기를 몰고 자살한 당일에도 경찰은 그의 집을 찾아갔고 그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역시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것은 불과 몇 시간 뒤였다.
▲ 자살한 폴커 클라비터(왼쪽)와 그가 살해한 아내 크리스티안네. | ||
그렇게 다시 하늘을 향해 날아간 그는 정확히 저녁 8시29분 국회의사당에서 불과 3백m, 그리고 총리 관저에서 2백m 떨어진 잔디 광장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무모한 자살 방법을 택했던 것일까. 그리고 실종된 그의 아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건 발생 후 경찰은 그가 아내를 살해한 것으로 굳게 믿고 집 근처와 직장 등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의 자살 동기가 아내를 죽인 데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확신한 경찰은 마침내 실종 일주일 만에 시체를 찾는 데 성공했다.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그의 집 지하실이었으며, 아내의 시체는 2m가량 쌓인 석탄 더미 속에 숨겨져 있었다. 물론 경찰의 추측대로 범인은 클라비터였다.
그가 유서를 남기지 않은 까닭에 정확한 살인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이웃 주민들과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아내의 외도를 의심했던 그가 우발적인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고 한다.
남편과의 불화로 견딜 수 없었던 아내가 마침내 폭탄 선언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의심했던 것처럼 새로운 남자를 사귀고 있던 그녀가 “아이들을 두고 당장 떠나라”며 협박한 것이다. 이에 평소 불 같은 성미였던 그가 가만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아내를 살해한 지 5일 만에 자신 역시 죽음을 택했던 그는 또 한 가지 의문을 남겼다. 왜 하필이면 자살 장소로 국회의사당 앞을 택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에 클라비터의 한 친구는 “그의 성격을 알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다. 허풍이 심하고 관심을 받길 좋아했던 그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는 것.
마지막 가는 길 역시 외롭게 이름 한 줄조차 남기지 않고 갈 바에는 차라리 온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독일 언론들은 잠시나마 ‘테러범 소행’이라며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그의 이름은 연일 뉴스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현재 베를린 상공은 시계가 좋고, 안전 고도(660m)만 잘 지킨다면 누구나 별 제재를 받지 않고 비행할 수 있도록 허가되어 있다. 단 비행중 정기적으로 송전탑에 신호를 보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 사건 후 독일 곳곳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어떻게 나라의 심장부가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느냐”고 말하는 한 시민은 “그가 진짜 테러범이었다면 꼼짝 없이 당했을 것 아닌가”라며 비난했다.
또한 일부 의원들은 “베를린 상공에서의 비행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