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의 카를 하인츠 그라서 재무장관. | ||
잘생긴 젊은 장관과 미모의 재벌 상속녀의 만남은 시작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특히 그라서 장관은 딸을 둔 오스트리아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신랑감으로 점찍어두었을 만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정치가.
이런 까닭에 그간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웬만한 할리우드 스타 못지 않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아왔으며, 결혼식 또한 파파라치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루어지는 등 온갖 가십거리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들의 로맨스는 동화 속에서처럼 근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라서 장관이 평범한 약혼녀를 배신하고 ‘돈’을 택했다는 비난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라서 장관의 정치 생명은 참으로 질기다. 여러 차례 스캔들에 휘말려왔음에도 불구하고 5년이 넘도록 꿋꿋하게 재무부 장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2000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오스트리아 최연소 재무부 장관에 임명됐던 그는 잘생긴 외모와 스마트한 분위기로 대번에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이어 터진 잡다한 스캔들로 점차 지지도가 하락하면서 그의 이미지는 ‘부도덕한 정치가’ ‘문란한 사생활의 정치가’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 평소 여자관계가 복잡해 ‘스캔들 장관’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도 갖고 있다. | ||
일단 둘의 사회적인 지위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당시 그라서 장관이 약혼한 상태였다는 데 있었다. 재무부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나탈리아 코랄레스-디에즈(28)와 5월에 결혼 날짜까지 잡아놨던 것. 당시 장관이 당연히 디에즈와 결혼할 것으로 알고 있던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장관이 말 그대로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전에 사귀던 변호사 애인을 일방적으로 차버리고는 새로 젊은 인턴을 사귀더니 말이다.
드골공항의 한 레스토랑에서 다정하게 찍힌 이 사진은 당시 웨이터를 비롯해 근처에 있던 수많은 학생들이 몰래 폰카로 찍은 것이었다. 사진을 찍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그라서 장관은 오스트리아로 돌아와서는 즉각 ‘행동’을 취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날 밤 바로 레스토랑으로 약혼녀를 불러냈던 것. 당시 목격자들에 의하면 둘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언성을 높여 다투었으며, 자정 무렵 결국은 각자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니나 다를까 <뉴스>에는 장관과 스와로브스키 상속녀의 키스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사진을 본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장관의 약혼녀가 지난 밤 나무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비록 부상은 경미했고, 그라서 장관의 대변인이 나서 “심각한 일이 아니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상심한 약혼녀가 자살을 기도했던 것”이라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에 그라서 장관은 인터뷰를 통해 “스와로브스키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그저 파리에 머무는 주말 동안 잠깐 만나 함께 박물관 구경을 하고 식사를 한 게 전부였다”고 둘러댔다. 또한 파리를 방문한 것 역시 프랑스 재무장관과의 사적인 미팅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게 웬 망신. 이 말을 전해들은 프랑스 재무부측이 “그런 약속을 한 적도 없고, 또 만나지도 않았다”고 잘라 말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스캔들 의혹이 증폭되는 가운데 마침내 스와로브스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장관과의 관계를 털어 놓으면서 “나는 지난 3년 전부터 그라서 장관을 사랑해왔다. 그는 내가 찾던 바로 이상형의 남자며, 앞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을 만큼 진지한 관계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파리에서의 키스 사진이 공개되기 전에 장관은 이미 약혼녀와 파혼한 상태였다”고 덧붙였다.
이에 그라서 장관 대변인은 펄쩍 뛰면서 “터무니 없는 소리다. 장관은 엄연히 약혼한 몸이며, 파혼을 하지도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고 못박았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라서 장관은 약혼녀가 퇴원하는 날 그녀 곁에 든든한 모습으로 서있었으며, 카메라 앞에서 다정하게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키스 사진’이 공개된 지 며칠 후 이번에는 카프리 해변에서 밀애를 즐기는 장관과 상속녀의 사진이 또 다시 잡지에 게재됐다. 비키니를 입고 다정하게 해수욕을 즐기는 이들의 사진은 다른 잡지사들에도 경쟁적으로 실리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이들의 관계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그라서 장관이 모든 스캔들을 시인한 것은 얼마 후였다. 상속녀와의 관계를 인정하면서 약혼녀와의 파혼 사실도 공개적으로 시인한 것.
한편 그는 몰카 사진을 실은 <뉴스>를 ‘사생활 침해죄’로 법정에 고소해 7천유로(약 8백80만원)를 보상받기도 했다. 이에 그라서 장관측은 “이로써 재무장관의 사생활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앞으로 언론은 아무리 유명 정치인이라고 할지라도 사생활을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실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정치인들의 사적인 스캔들은 묵인해주고 있는 편이다. 이는 공인의 사생활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 결과적으로 아무리 사생활이 복잡해도 맡은 임무만 훌륭히 수행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라서 장관은 스캔들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다. 키스 사진 공개로 한때 바닥을 쳤던 지지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상승했으며, 결혼식이 있기 일주일 전에 실시된 한 전화 설문조사에서는 무려 72%의 지지율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의 결혼식 역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은 물론. 이런 까닭에 그는 파파라치의 접근을 막기 위해 한동안 결혼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으며, 결혼식 장소 또한 철두철미하게 기밀에 부쳤다. 식 당일에야 비로소 알려진 결혼식 장소는 바로 다뉴브 강변에 인접한 포도밭. 1백 명의 하객들만 초대된 이날 결혼식에는 볼프강 쉬셀 오스트리아 총리를 비롯한 여러 명의 정치계 거물들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타 커플 탄생과 다름없는 이들 부부의 행보가 과연 앞으로 오스트리아 정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 많은 사람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