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주식시장을 뒤흔드는 테마주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 주식시장을 배회하는 유령 ‘정치 테마주’
한 코스피 상장 기업의 주가가 석 달 만에 3배 넘게 뛰었다.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1000원 안팎에 머물렀지만 올해 들어 순식간에 3500원을 넘어섰다. 이 종목이 최근 자유한국당 당권 도전에 나선 ‘황교안 전 국무총리 테마주’로 묶이면서다. 가장 큰 폭으로 오른 시점은 황 전 총리의 자유한국당 입당 소식이 알려진 직후, 그리고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 중 지지율이 가장 높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부터다. 현재 이 종목을 포함한 총 6개 종목이 ‘황교안 테마주’로 불리면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종목이 테마주로 묶인 이유는 단 한가지다. 최대주주나 경영진이 황교안 전 총리와 학교 동문이라는 이유다. 황 전 총리의 이름을 빼면 주가가 올라갈 만한 특별한 소식은 없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앞서 주식이 3배 오른 회사는 지난해 3분기 누적 당기순이익은 71억 원으로 2017년 같은 기간보다 24.4% 감소했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0.8%, 25.3% 줄어든 1509억 원, 98억 원이다.
회사 측도 “최대주주와 황 전 총리가 성균관대 동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상의 친분은 없다”고 공시했다. 테마주로 묶인 다른 회사도 “대표이사가 성균관대 동문인 것은 사실이지만 황 전 총리와 관련된 사업 내용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이 공시 이후 주가가 잠시 하락세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하루에도 수차례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황교안 테마주’는 지난 1년 간 주식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 테마주 가운데 하나다. 차기 대선주자로 언급되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이낙연 총리의 테마주로 알려진 두 개의 종목은 지난해 1월 29일부터 올해 1월 29일까지 1년 동안 각각 84.6%, 153%씩 급등했다. 유 이사장이 테마주에 대해 직접 “그거 다 사기”라며 “선거에 나갈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고, 이낙연 총리도 “회사 이름을 이번에 처음 들었다”고 말하면서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지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주요 기업보다 더 많이 거래되는 기록을 세웠다.
정치 테마주 투자는 투기와 마찬가지라고 분석하는 금융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기업의 실적이나 향후 전망과 무관하게 단지 테마주라는 이유만으로 급등락하는 종목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 투자자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뛰어들었다가, 자칫 매도 시기를 놓치게 되면 이익은 커녕 원금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17년 테마주에 투자해 손실을 본 투자자 대부분은 개인 투자자(99.6%)로 조사됐다. 심리대상 종목은 총 26건이었는데, 이 가운데 20건은 대선후보 관련 정치 테마주였다. 여기에 최근 테마주로 묶여 주가가 큰 폭으로 올랐던 한 종목은 대표와 오너 일가가 악화된 실적을 공개하기 직전 보유 주식을 대거 처분하면서 불공정거래 의혹을 받기도 했다.
최근 ‘황교안 테마주’가 주식시장을 뒤흔들었다 .사진은 황교안 전 총리가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토론회에 참석한 모습.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테마주 위험성, 알아도 투자하는 이유는
기대 심리와 거품이 섞여 주식 시장을 떠도는 테마주의 특성과 위험성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금융당국과 전문가들도 투자에 유의하라며 수차례 경고해 왔고, 투자자들도 테마주와 관련된 지적과 주의 당부가 나오면 “그걸 모르고 주식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말한다. 그런데도 테마주의 그림자는 쉽게 걷히지 않는다.
‘단기 급등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이라는 게 증권가의 중론이다. A 증권사 연구원은 “테마주가 알려지고 짧게는 일주일, 길면 한 달 사이 주가가 몇 배씩 오르는 일이 여러 차례 반복 돼 왔다. 위험을 무릅쓰고도 타이밍만 잘 잡으면 20~30% 수익률을 낼 수 있다는 게 테마주의 가장 큰 유혹”이라며 “그동안 대부분의 테마주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특히 지난해 코스피와 코스닥이 각각 두자릿 수 하락세를 보이면서 ‘정상적인 투자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심리 등이 테마주를 이끄는 동력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테마주가 시장 참여자들의 ‘합의’가 작동하는 하나의 거래 방식이라는 시각도 있다. 단순 투기로만 볼 게 아니라는 얘기다. 주식시장에서 정보는 가장 큰 무기로 통한다. 그 정보가 소문이든, 단순 개인의 의견이든 중요한 게 아니다. ‘소문에 사서 뉴스에 팔라’는 말은 주식시장의 오래된 ‘격언’이기도하다. 오히려 이러한 불확실한 정보를 역이용해 돈을 버는 ‘역발상 투자’도 하나의 투자 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B 증권사 연구원은 “주식시장에 테마주가 등장하면 사실확인이 거의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정확한 정보가 나오거나, 소문이 시장에 영향을 주면 반대매매 등이 이뤄지면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서 자정 작용이 일어나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체가 보이는 테마주도 있다. 최근 정치 테마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소차나 남북경협 테마주가 대표적이다. 수소차 테마주는 현대차그룹이 최근 핵심 산업으로 지정한데다, 정부 정책까지 뒷받침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급등하고 있다. 앞서의 정치 테마주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설득력이 있는 셈이다. 지난해 상반기부터 주식시장에 나타나 최근까지도 관심이 끊이지 않는 남북 경협 테마주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테마주 투자에 부정적이고, 만약 투자 하더라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수소차와 남북경협 관련 주들은 충분히 기대할만한 종목이긴 하지만, 실체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도 사실”이라며 “그에 비해 주가가 오르는 폭과 속도가 너무 빠르다. 딱히 서두를 상황도 아니고 상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사업 방식이나 구조 등을 꼼꼼히 따져보고 투자하는 게 장기적으로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전직 C 증권사 임원은 “한국형 테마주의 시작은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방외교와 동시에 일명 ‘만리장성’ 종목이 주식시장을 흔들었다. 중국 만리장성 바람막이 설치에 국내 업체가 참여하는데 뜬금없이 공사 인부들이 신을 신발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특정 신발 회사 종목이 관심을 받았고, 간식으로 호빵이 공급되고, 그걸 먹다 체하면 소화제가 지급된다며 특정 신발, 호빵, 제약 회사 주가가 크게 올랐다”며 “지금 언급되는 테마주들도 근본적으로 30년 전 만리장성 테마주와 다른 게 없다. 태생부터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투자하면 원하는 결과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주식시장의 진리다”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