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찾아간 충북 우암동 수암골 <제빵왕 김탁구> 촬영현장. 주인공 김탁구 역의 윤시윤(오른쪽)이 구마준 역의 주원과 함께 연기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드라마가 방송될 때까지 정말 고비가 많았다. 인큐베이터 속의 조산아 같았다. 과연 방송이 가능할지 걱정하며 첫 방송 예정일인 6월 9일만 무사히 넘기자는 생각으로 버텼다.”
지난 8월 10일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빵왕 김탁구> 기자간담회에서 이정섭 PD가 밝힌 소감의 일부다. 50%를 육박하는 시청률을 예상하긴커녕 방영조차 불투명했던 드라마였던 것. 월드컵 기간에 맞춰 방영되는 데다 월드컵 이후 경쟁작들도 쟁쟁한 대작 드라마들이라 대진운부터 최악이었다. ‘제빵’을 소재로 70~80년대 향수를 자극한다는 게 그리 신선하지 않은 데다 미니시리즈가 아닌 50부작 시대극이라는 점도 한계였다. 거듭된 고사로 어렵게 캐스팅을 마무리했지만 스타급 배우는 거의 없다. 타이틀롤 김탁구 역에는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윤시윤이 발탁됐지만 정극 연기 경험이 거의 없다. 라이벌 ‘구마준’으로 캐스팅된 주원은 뮤지컬 배우 출신으로 방송 출연 자체가 처음인 생짜 신인. 이들과 호흡을 맞추는 여배우에는 이들보다 대여섯 살 위인 유진과 두세 살 연상인 이영아가 결정됐다. 그나마 장항선 전광렬 전인화 박상면 이한위 박성웅 등 쟁쟁한 조연급 배우들이 모인 게 커다란 힘이 됐다.
어렵게 편성을 받았지만 50부작은 30부작으로 줄였고 첫 방송일은 월드컵 개막 직전인 6월 9일, 4회가 방송되는 6월 17일은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조별리그 2차전과 시간이 겹친다. 아역 배우들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초반부 시청률이 저조할 경우 30부작까지 밀고 갈 원동력을 잃게 돼 조기 종영할 가능성이 크다. 대다수의 방송관계자들 역시 <제빵왕 김탁구>의 조기 종영을 점쳤다. 게다가 월드컵과의 정면 승부 이후엔 소지섭 윤계상 김하늘의 <로드 넘버 원>과 김남길 한가인의 <나쁜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
▲ 드라마 속의 팔봉빵집. 촬영이 없는 날엔 관광객들에게 맛있는 빵을 파는 진짜 빵집으로 변신한다. |
충청북도 청주시 소재의 수암골은 본래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해 형성된 달동네로 현재도 당시의 모습이 동네 곳곳에 남아 있고 주민도 노년층이 많다. 올해 초부터 수암골 언덕 위에 공사에 들어가 갤러리 하나가 완성돼 지난 3월 25일 문을 열었다. 공예 디자인 작가 박소연 씨가 관장으로 문을 연 W갤러리가 바로 그것.
당시 <제빵왕 김탁구> 제작진은 드라마의 야외 촬영 세트장을 구하기 위해 한참 애를 쓰고 있었다. 흥행이 예상되기는커녕 조기종영 위험성이 높은 <제빵왕 김탁구>의 촬영 지원에 선뜻 나서는 지자체가 거의 없어 골머리를 썩던 상황에서 나선 곳은 충청북도였다. 딱히 내세울 만한 관광지가 없는 충청북도는 수암골에 신현준 소지섭 채정안 한지민 등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드라마 <카인과 아벨> 촬영을 유치했지만 드라마 시청률이 너무 저조했다. 그들이 난처해진 <제빵왕 김탁구>의 구세주가 된 것. 대통령 별장이던 청남대를 비롯해 충북의 명소들이 촬영 장소로 선정됐다.
문제는 팔봉빵집이었다. 제작진은 수암골 소재의 W갤러리를 우선 순위로 선정했다. 건물이 예쁘게 새로 지어진 데다 언덕 위에 위치해 다른 건물이 화면에 걸리지도 않고 주변도 조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건물을 새로 지어 갤러리를 오픈한 지 채 두 달도 안 된 상황에서 촬영장소로 협찬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박 관장은 “대충청 방문의 해에 맞춰 관광 명소 개발을 위해 충청북도와 청주시에서 거듭 요청해와 결국 무상 대여를 결정했다”고 얘기한다. W갤러리가 팔봉빵집으로 결정된 것은 첫 방송 1주일 전 인 6월 2일, 내외부 공사를 통해 팔봉빵집으로 다시 태어나 첫 촬영이 시작된 것은 6월 15일이다. 극적으로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조산아에게 새집이 생긴 셈.
예상은 깨지라고 있는 법이다. 아역들이 출연한 드라마 초반부가 막장 논란에 휩싸이며 예상외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 월드컵과의 정면 승부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월드컵을 피해가려 하지 않고 정면 승부한 게 오히려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 고지 무혈입성을 가능케 했다.
그 열기는 수암골 팔봉빵집 촬영 현장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드라마 촬영이 없던 지난 8월 5일. 팔봉빵집 촬영장엔 수천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주중 2~3일가량은 드라마가 촬영되고 나머지 날에는 제과점이 돼 빵을 판매한다. 개당 1000원씩 판매되는 빵이 하루 5000개 이상 팔려나갈 정도. W갤러리 박 관장은 “관광객들에게 추억을 서비스하는 차원에서 빵을 팔고 있다”면서 “드라마 종영 이후 그 열풍을 지속하기 위해 계속 팔봉빵집으로 유지할 계획”이라고 밝힌다.
촬영이 있는 날에는 빵을 사먹을 순 없지만 관광객은 더욱 많이 몰려든다. “촬영 현장에서 늘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신다”는 김탁구 역의 윤시윤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그분들의 성원으로 드라마가 완성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 드라마로 데뷔한 ‘구마준’ 주원 역시 “쉬는 날에는 집에만 있어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지만 청주 팔봉빵집 촬영이 있는 날마다 조금씩 인기를 실감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팔봉빵집을 찾은 관광객 가운데 상당수는 청남대 등 인근 <제빵왕 김탁구> 촬영 현장까지 돌아보고 있어 충북에 새로운 관광 패키지가 탄생하고 있다. 심지어 드라마 속 빵을 제공하는 곳으로 알려진 제과점에도 관광객이 몰려 저녁 무렵에 빵이 모두 팔려버릴 정도였다. 이런 흥행 열풍을 가장 환영하는 이들은 ‘대충청 방문의 해’를 준비한 충북도청이다. 이시종 충북도지사는 “충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가 이렇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줄은 미처 몰랐다”며 “이번 드라마를 계기로 충북을 더 많이 알릴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취재진이 수암골을 다시 찾은 것은 태풍 뎬무가 한반도에 상륙한 8월 10일. 거센 빗줄기를 뚫고 촬영 준비에 돌입한 스태프의 얼굴은 비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이날 촬영은 팔봉빵집에 원한을 가진 이와 김탁구가 빵집 앞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장면. 화요일인데 목요일 방영 분량을 촬영하는 상황이라 비가 와도 촬영은 강행된다. 다행히 촬영이 시작될 무렵 빗발이 약해져 촬영은 무난히 진행됐다. 쉬는 날인 수요일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날을 새우다시피 하는 제작진과 배우들. 비를 맞으며 촬영을 강행하는 스태프를 주원은 ‘강철 체력의 소유자’라 칭송하고 유진은 ‘건강이 걱정되는 고마운 분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배우들의 칭찬 릴레이에 스태프를 대표하는 정해룡 CP는 “탁구의 긍정성과 역경을 이겨나가는 도전 정신이라는 좋은 주제가 흥행 원동력”이라며 “극적인 갈등 구조가 좋은 주제를 잘 부각시켜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자평한다. 출연 배우들에게도 성공 요인을 물어봤다. 김탁구 역의 윤시윤은 “난 부족한 배우지만 탁구는 정말 대단하다. 이런 탁구의 힘에 보이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스태프의 진심이 더해져 높은 시청률이 가능해진 것 같다”면서 “예쁜 남녀가 있으면 사랑하고, 약자와 선한 자가 강자와 거짓된 자를 이기는, 그런 사람들이 모두 바라는 내용의 드라마라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 같다”고 흥행 대박의 이유를 설명한다. 또 유진은 “어려서 보던 드라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라며 “막장 소지도 있지만 다 설득력 있는 막장이라 시청자들이 공감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영아는 처음부터 대박을 믿고 있었단다. “집중력이 없어 책(대본)을 받으면 한 번에 잘 못 보는 편인데 이번엔 4권까지 한 번에 봤다”면서 “책의 힘이 워낙 대단해 20% 이상은 될 거라 여겼는데 40% 이상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는다.
청주=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촬영장소 ‘수암골’은
한적한 달동네 시끌시끌
청주시는 수암골 일대에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간직한 옛 물건들을 전시할 ‘달동네 박물관’ 건립을 검토 중이다. <제빵왕 김탁구> 열풍에 맞춰 수암골 일대를 관광 명소로 개발할 계획을 구체화한 것.
그런데 <제빵왕 김탁구> 열풍으로 수암골에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자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불평의 목소리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많이 사는 조용한 동네가 급격히 몰려든 인파로 시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포장마차 ‘아침이슬’이었다. 팔봉빵집 바로 앞 공터에 실제로 포장마차가 운영 중이었는데 운영은 수암골 부녀회가 맡고 있다. 관광객이 몰려들수록 포장마차 매출도 늘면서 인근 주민들의 불만도 눈 녹듯 사라진 것. 실제 팔봉빵집을 찾는 관광객들이 대거 포장마차 ‘아침이슬’을 찾았다. 관광지지만 가격도 상당히 저렴하다. 파전 3000원, 팥빙수 3000원, 옥수수 2000원에 막걸리와 소주는 2000원이다.
여기저기서 “협찬해주겠다”
‘제빵’이 주된 소재이자 제목에도 들어가 있지만 <제빵왕 김탁구>는 제빵 관련 기업체의 협찬도 받지 못한 채 촬영이 시작됐다. 물론 시청률이 50%를 육박하는 요즘엔 협찬을 하겠다는 업체들이 여럿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사 측은 “한두 주 이내에 협찬회사가 결정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제빵왕 김탁구>는 회가 거듭되며 시청률이 급상승하자 희망업체도 급증하고 있다. 제빵 드라마이나 제빵 기업체의 협찬도 없이 시작된 <제빵왕 김탁구>가 이젠 협찬 업체를 고를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
그동안 주된 협찬사 역할을 해온 곳은 청주시 소재의 서문제과다. 현재 팔봉빵집에서 관광객들에게 판매되는 하루 5000여 개의 빵 가운데 2000개가량도 이곳에서 만든 것이다. 사실 서문제과는 서문우동으로 더 유명하다. 3대째 내려온 우동국물이 자랑이며 점심시간엔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다. 드라마에서도 몇 차례 나왔는데 지난 19회에서 탁구와 유경의 데이트 장소로 등장한 식당이 바로 서문우동이다. 이곳이 서문제과 간판까지 같이 내건 까닭은 50년 경력자의 제빵사가 만든 ‘옛빵’(드라마에 나오는 70~80년대 빵)들을 계산대 옆에 비치해 놓고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