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의 삼남 김정은이 2인자로 부상하면서 군부의 왕별들이 하루아침에 떨어지는 등 북한의 권력 핵심부가 요동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9월 28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된 당대표자회에 참석한 김정은 모습. 연합뉴스 |
지난해 2월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오극렬은 이번 인사에 아무런 요직을 얻지 못했다. 숙청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김정은 후계 구축과정에서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과 권력다툼을 벌이다 완패한 때문이란 관측이다. 군부는 물론 노동당 파벌들 간에는 핵심요직 차지와 외화벌이를 둘러싼 죽고살기식의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 평양 로열패밀리 형제들 사이에서는 피비린내를 풍기는 권력투쟁이 진행되는 형국이다. 2010년 가을 평양에는 권력투쟁의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게 북한을 지켜보고 있는 정보 당국자들의 전언이다.
이런 돌풍을 몰고 온 건 물론 김정은이다. 그는 지난 9월 28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했다. 병역면제자인 셈인 그는 단번에 군 대장에 올랐다. 주민들 사이에 ‘청년대장’으로 불리던 김정은은 후계 가시화와 함께 진짜 ‘대장’이 됐다. 또 군부를 좌지우지할 노동당의 최고위급 자리 중 하나인 군사위 부위원장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은 중앙군사위원장이다. 국방위원장 겸 최고사령관 자리도 갖고 있다. 절대 권력자의 셋째 아들 김정은의 공개석상 등장과 공직 부여는 곧 그가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선포한 것과 마찬가지다.
회의 직후 공개된 김정은의 노동당 대표자회 기념사진은 그를 떠받쳐갈 평양 권력층의 세력판도를 한눈에 고스란히 드러낸다. 새로운 인선의 서열에 따라 당·정·군의 핵심 요직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 양복 차림의 노동당·내각 핵심인사들과 정복 차림의 군 간부들이 자리한 모습은 이들이 후계체제의 양대 축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촬영장소로 김일성 시신이 미라 상태로 보존돼 있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을 택한 것은 김정은까지로 이어진 3대세습의 신고식을 치른 것이란 평가다.
김정은 권력의 후견인이 될 세력들도 포진했다. 고모 김경희 노동당 부장과 그녀의 남편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다. 김정일은 여동생 김경희도 김정은을 함께 ‘군 대장’ 직위에 올림으로써 향후 두 사람이 공동의 운명을 걸을 존재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김정일의 곁에서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온 김옥과 김정은의 여동생 여정으로 확실시되는 인물이 등장한 점이다. 김옥은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가 숨진 직후부터 김정일과 함께 지내며 부인 역할을 했다. 2008년 여름 김정일이 쓰러졌을 때 병상통치를 대신하며 파워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들 모두 김정은 후계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할 면면들이다.
김정은 후계자의 등장을 위해 마련된 당 대표자회는 앞으로 차기 리더십을 보위할 세력들의 출정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김정은은 아직 불안한 후계자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까지 무려 20년 후계수업을 받았다. 그렇지만 김정은의 후계수업 기간은 고작 2년 정도다. 자칫 부자세습의 바통터치가 잘못되면 북한체제가 붕괴되는 극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 현재 후계체제 과정에서 가장 문제로 꼽히는 것은 역시 김정일의 건강.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어느 정도 회복을 했지만 한·미 정보당국에서 3~5년 생존설이 나오는 등 심각한 상태다.
다른 복병도 있다. 후계 자리를 둘러싼 암투 가능성이다. 김정일 로열패밀리의 아들 간에도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정보당국의 판단 내용이다. 일단 김정은이 후계자로 사실상 자리하면서 승기를 잡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는 얘기다. 정은의 친형 정철의 경우 호르몬계 이상 등 질환으로 후계구도에서 완전 탈락했다. 정은에게 도전하거나 위협을 가할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맏형 김정남이다. 김정남은 한때 후계구도 영순위였지만 결국 막내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그는 지금 마카오 등지를 떠돌고 있다. 하지만 평양과 중국 등지에 지지기반이 여전해 김정은 후계체제에 위해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을 김정은도 간파하고 있다고 한다.
보위부 병력을 동원토록 직접 지시를 내린 사람은 김정남의 이복동생인 김정은이었다. 한때 김정남이 유력시됐던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김정은이 잠재적 위협세력인 김정남 일파를 거세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펼친 것이란 관측이 북한 권력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이로부터 두 달 뒤에는 김정은의 측근들이 김정남을 암살하려 했으나 사전에 이를 알아챈 중국의 반대로 제동이 걸렸고 중국 측이 김정남을 은신처로 피신시키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얘기도 있다.
후계자에 대한 위해 가능성도 북한으로선 불안요인이다. 때문에 후계자로 자리를 굳혀가는 김정은에게 특별경호를 시작한 것으로 우리 정보당국은 파악한다. 호위사령부 내에 김정은 경호를 전담하는 과(課)단위의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고지도자의 가족 경호 차원에서 다뤄지던 김정은 경호가 별도 전담팀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은 그가 이미 ‘패밀리 멤버’ 그 이상, 후계자임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정은에 대한 이 같은 경호는 외부세력에 의한 최고지도자 위해 가능성을 북한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이 내부적으로 장성급 이상 고위 군 간부들을 교육하는 데 쓰는 자료인 학습제강에 잘 나타난다. 이 자료는 김정일 경호와 관련해 “놈들은 수뇌부 호위사업과 관련한 비밀을 뽑아내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우려는 후계자가 된 김정은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현재 북한이 가장 우려하는 건 김정일·김정은의 유고사태다. 모든 힘이 집중된 절대 권력자의 몰락은 결국 체제 붕괴를 의미한다. 북한 당국이 2003년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몰락사례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라크는 10만 명의 공화국 근위대, 특히 메디나 사단이 충성도가 높아 후세인의 신변안전이 확고히 담보된다며 큰소리 쳤다. 이라크전 이후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개 활동과 관련한 일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방문 날짜도 관영매체의 보도에서 사라졌다. 반체제 세력에 의한 위해 기도나 외부세계의 김정일 체제 전복 움직임을 우려한 것이다. 과거 용천역 폭발사고 당시에는 단순 사고가 아닌 김정일을 노린 계획적인 폭발이었다는 관측이 제기된 바 있다.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는 건 군부의 동향이다. 김정일은 집권 직후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별히 노력했다. 1994년 7월 갑자기 숨진 아버지 김일성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뒤 무엇보다 군부의 지지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군부 고위 인사들에게는 최신형 벤츠와 특각이 주어졌고 자신의 생일이나 주요 기념일에는 북한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승진인사가 이뤄졌다. 북한군 장성의 숫자가 우리 군의 3~4배에 이르는 1300명 수준이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정일이 군부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고 핵심 측근들로 방어막을 치고 있다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절대 권력자일수록 가장 믿었던 최측근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일 시대 들어 절대적 충성심을 보여 온 북한 군부지만 정정이 혼란해지면 언제든지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뛰어들 소지가 있다. 김정일에 대한 위해설이나 피격설은 이미 서울 증권시장의 단골메뉴가 됐다. 북한군 친위대의 고위 장교가 부대방문 중인 김정일을 총격하려 했다거나 차량으로 밀어붙였다는 소문 등이다. 김정일 피격설 등 루머가 나도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다.
집단적인 군사반란 성격의 사건도 있었다. 옛 소련 푸룬제군사학교 출신들이 과거 김일성 체제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모의했다 발각돼 모두 처형됐던 일이 있다. 또 1990년대 함경도 지역을 담당하던 6군단에서 비리가 결부된 군부의 반발이 일어나 김정일 위원장이 이를 진압하고 군단 자체를 해체해버린 일이 있었다. 지난 1992년에는 인민무력부 부총참모장인 안종호가 김일성 부자의 제거를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돼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군부는 여차하면 일을 벌일 수 있는 ‘전과’가 있다는 얘기다.
이런 우려는 군부가 과거 김정일에 대해 잠재적인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경험을 적잖이 했다는 측면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북한 군부의 반발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전개된 남북 화해협력 과정에서 표출되기 시작했다. 1998년 6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을 둘러싼 북한 군부와 대남기관 간의 알력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정부 들어 잇단 화해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북한 군부에게 소떼 방북을 위해 판문점을 열어 달라는 대남기관의 요구가 좋게 들릴 리 없었다. 금강산 관광개방 때는 “군사요새나 다름없는 금강산을 남한 관광객에게 내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맞서서 진통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평양 상층부의 결심은 이미 금강산을 특구로 현대에 내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군부는 또 다시 쓴 맛을 봐야 했다.
후계구축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김정일이 건강이상 등으로 급작스레 사망하고 미처 준비되지 않은 후계자 김정은이 통치능력을 상실해버리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또 후계자의 신변이상 등으로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하는 돌발변수도 배제할 수 없다. 후계구도에 이상이 생길 경우 집단지도체제가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런 집단지도체제가 부자승계에서 생길 응급상황에 대처할 안전판 역할을 할 것이란 주장이다.
군부 주도의 집단지도체제는 국방위원회가 이끌 가능성이 높다. 조명록 제1부위원장이 노환으로 거동이 어렵다는 점에서 실질적 권한은 현철해·리명수 실세그룹이 거머쥘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두 사람은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이나 경제시설 현지지도 때 가장 많은 횟수를 수행하는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또 당 대표자회를 통해 화려하게 등극하며 최고 파워그룹으로 자리한 리영호 총참모장이 주도할 공산도 크다.
노동당 주도의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경우 실세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 노동당 경공업부장의 남편으로 국가안전보위부와 검찰·재판소 등 권력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2004년 조직지도부 부부장 시절 부하직원들의 호화결혼식 등 스캔들 때문에 철직(撤職)당했으나 2년 뒤 복귀, 승승장구했다. 지난 6월 국방위 부위원장에 임명되자 김정은 후견인 역할을 할 2인자로 등극한 것이란 평가다.
절대 권력자가 유고상태에 빠지는 절박한 상황에서 집단지도체제가 가동되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김정은 후계체제의 데뷔 과정에서 이미 군부와 노동당 내부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을 것이란 관점에서다. 이번 인사에서 배제돼 몰락 단계에 접어든 세력들이 죽기살기식의 생존경쟁을 벌일 것이란 지적도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 당 대표자회 직후 나온 대북외교안보부처 핵심 당국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번은 정말 대대적인 리셔플(Reshuffle, 자리바꿈)이다. 이 정도로 인사가 크게 나오면 그 안에서 뭐가 없을 수가 없다. 잘나가는 놈 못나가는 놈, 실망하는 세력들이 있기 마련이다.”
오극렬 등 실세그룹의 몰락 과정에서 분란의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얘기다. 물론 북한 후계체제를 둘러싼 평양 권력내부 동향을 들여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관련 정보가 부족하다. 김정일 후계체제를 추적하는 정보요원들과 전문가·당국자들 사이에는 “확실한 건 김정일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뿐”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그만큼 비밀에 싸인 북한체제를 분석·전망하는 게 힘들다는 얘기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 이후 가장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 김정일의 건강과 군부의 동향, 형제들의 권력투쟁 같은 다양한 복병이 숨어있다. 평양 권력은 지금 김정은 후계체제의 명운을 가를 분수령에 서있다.
김성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