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17 여자월드컵 우승을 일군 최덕주 감독. 어린 소녀 선수들을 지도하려면 염색부터 해야겠다는 기자의 말에 “그럴 시간이 없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세 딸의 아버지라는 경험 때문인지 그는 선수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온화한 카리스마로 ‘월드컵 우승’이라는 기적을 이끌어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리터칭=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먼저, 세 딸의 아버지로만 알려졌을 뿐, 자세한 가족사는 공개되지 않았다. 혹시 얘기해줄 수 있겠나.
▲큰딸이 스물일곱 살로 대학에서 컴퓨터그래픽을 전공했다. 그 밑이 쌍둥이인데 한 아이는 외국어를 전공하고, 다른 아이는 경제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 모두 대학 4학년생들이고 가족들은 오사카에서 거주 중이다. 딸 셋 중 한 명은 운동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운동을) 해보더니 포기하더라. 내 나이에 비해 아이들이 크다 보니까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한다. 솔직히 고백해서 스물넷에 약혼한 뒤 그 이듬해 큰애를 낳았다. 약혼하고 좀 ‘오버’를 한 셈이다(웃음).
―딸 셋을 키운 부분이 여자축구를 지도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건가.
▲당연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큰애는 한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고 쌍둥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아이를 누구한테 맡길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우리 부부가 온전히 아이들을 돌보면서 성장과정을 제대로 지켜볼 수 있었다. 여자 아이들의 감성적인 면을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그 부분이 여자축구팀을 맡았을 때 선수들한테 다가가는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요즘 애들’이란 말을 종종 한다. 당당하고 겁도 없고 자기 주장도 강하고 개성이 중시되는 여자 선수들을 이끌고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내 경험에 의하면 야단맞고 체벌을 받을 때 더 대들고 어긋나게 되더라. 강압적인 방법은 일시적인 효과는 낼 수 있지만 아이들이 창의적인 플레이를 하는 데에는 마이너스 요인이 훨씬 많다. 감독 눈치를 보게 되고 감독이란 존재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된다. 난 선수들이 잘못된 플레이를 했다고 해서 야단을 치진 않는다. 단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정확히 짚어 준 다음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선수들은 앞에선 진지하게 듣는 척하다가 뒤돌아서면 내 말을 곧잘 잊어버린다(웃음). 그 또한 뭐 어떤가. 축구는 손이 아닌 발로 하는 건데, 실수도 할 수 있고 실수를 반복할 수도 있지 않겠나.
―최근 최덕주 감독의 ‘온화한 리더십’이 화제다.
▲난 내가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너무 거창하게 포장된 것 같아 민망할 정도다. 축구라는 게 정답이 없다. 100% 완벽한 몸을 갖고도 질 수 있는 반면 80% 정도의 부족함을 갖고도 이길 수 있는 게 축구다.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엄하게 훈련을 시켜서 좋은 결과를 내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부드러운 스타일로 팀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도 있다. 어느 문구에 ‘부모가 되고 싶나? 아니면 학부모가 되고 싶은가?’라는 내용이 있다. 난 학부모보다는 부모가 되는 걸 선택했다.
―어떻게 해서 여자축구를 맡게 됐나. 처음에는 남자축구 지도자로 활동할 계획이었을 것 같은데.
▲일본에서 귀국 후 2006년 대한축구협회 최상위 지도자 과정 중이었는데 때마침 여자축구의 전임 지도자 자리가 비어있다기에 덥석 맡게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좀 갈등도 있었다. 내가 여자축구를 제대로 지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축구는 남자만 하는 걸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세 딸도 키워봤겠다 여자축구도 똑같은 축구라고 생각하니까 어려울 게 없다는 자신이 들더라.
―일본에서 18년을 생활했다. 선수로도 뛰었고 지도자 생활은 훨씬 오래 됐다. 오사카 조선고등학교 감독을 맡았을 때는 우승만 세 차례를 했었고 오사카 성인선발팀 수석코치로 있으면서 37년 만에 전국체전 우승을 일궜다.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을 만한 상황이었는데 왜 귀국을 결심했는지 궁금하다.
▲전국체전 우승 뒤 팀에서 우승 파티를 열었다. 그때 오사카축구협회 회장님이 오셔서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네가 일본 사람이면 전폭적으로 밀어줄 텐데 한국 놈이라 안 되겠다’라고. 그분의 말씀이 상당히 섭섭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곳이 더 이상 내가 설 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귀국을 결심한 것이다.
▲ 최덕주 감독이 북한의 리성근 감독과 서로 선전을 기원하며 악수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남아공전에서 후보 선수들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
▲축구를 하면서 선배들로부터 항상 들었던 얘기가 일본과의 경기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라고 들었다. 그런 역사가 일본에서 직접 경험한 내 히스토리에 얹혀 일본전에는 더 큰 욕심을 내게 된다. 선수들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작년 AFC 때 내 얘길 해줬더니 ‘선생님, 걱정마세요. 우리가 경기 들어가면 몸을 던져서 싸울게요’라고 말하더라. 이번 대회는 작년에 붙었던 선수들 대부분이 엔트리에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더 자신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질문을 해보겠다. 한국 여자축구가 월드컵 무대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우승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여자축구의 양대 산맥은 미국과 독일이다. 독일은 여자축구 선수들이 105만 명이다. 만약 우리가 독일과 결승에서 만났더라면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나라들을 제치고 한국이 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선수들의 정신력’ 때문이다. 매 경기 바닥난 체력으로 울면서 뛰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뛰었던 선수들의 강한 정신력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여민지 같은 경우, 준결승, 결승에서 뛸 수 있는 체력이 없었다. 민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의 체력은 제로였고, 그 제로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준결승, 결승을 지켜보며 나 또한 벤치에서 많이 울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더 힘들었다.
―여민지의 체력이 바닥났다면 결승전 때는 중간에 교체할 것을 고민했을 것도 같다.
▲경기 전 민지한테 이렇게 얘기했다. ‘MVP와 골든슈를 받으려면 네가 그라운드에서 쓰러져도 난 교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게 예선전이었다면 당연히 교체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시상을 앞둔 상태에서 민지를 뺄 수가 없었다.
―항간에 ‘여민지 왕따설’이 나돌기도 했었다.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 민지는 정말 겸손하고 성실한 아이다. 원래 겸손하지만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얼굴 볼 때마다 겸손해라, 남을 배려해라 하는 잔소리를 한다. 배려를 해야 사람들이 널 지켜준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분수령이 됐던 경기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8강에서 붙은 나이지리아전이다. 사실 나이지리아에 대비해 훈련을 굉장히 많이 했다. 나이지리아 선수들이 공격진도 좋고 스피드가 뛰어난 탓에 예측 불능의 플레이를 한다. 그러나 수비가 약한 단점을 이용해서 시물레이션 훈련을 반복해서 했었다. 경기 전 우리 수비수들한테 ‘10분만 버티자. 10분만 열심히 버텨주면 그 후 흐름은 우리한테 온다’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경기 시작 2분 만에 골을 먹더라. ‘얘네들이 집중도 안 하고 어떻게 하려고 이러지’라고 생각하는데 또 골을 먹더라. 오늘 경기가 어려워지겠다 싶었는데 한 골, 두 골, 동점골까지 터트리다 다시 또 역전을 당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다.
―그래서 전반전 끝나고 라커룸에서 처음으로 선수들을 혼내고 그랬던 게 아닌가.
▲물통을 걷어차는 등 일종의 ‘쇼’를 했는데 애들은 그게 다 쇼라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웃음).
―공식 행사나 인터뷰 때마다 여자축구 지도자들의 처우 문제에 대해 언급했었다. 어느 정도 열악한 상황인가.
▲남자축구는 지도자들의 월급이 모자랄 경우 학부모협의회 등에서 모아 채워주곤 한다. 그러나 여자축구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이 돼야 감독이 연구할 마음도 생기고 애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할 수 있는데 실상이 그렇지 못하니까 지도자들이 딴 짓도 하게 되고 하면 안 되는 일에도 손을 대기도 한다. 그들한테는 생계의 문제다. 그 부분이 하루 빨리 개선돼야 여자축구도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전북 현대 최강희 감독과 절친한 사이라고 들었다.
▲최강희 감독 나이가 59년생으로 알려져서 나도 실제로는 59년생이라 친구처럼 지내려 했다. 그런데 최 감독이 ‘나이를 많이 줄였다’면서 진짜 나이가 57년생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깍듯하게 ‘형님’으로 모시면서 가깝게 지냈다. 내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최강희 감독이 백수 신분이었다. ‘백수들’끼리 자주 만나 어울리면서 동병상련의 느낌을 가진 것 같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게 뭔가.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는데 더 큰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유소년 팀을 지도하는 것이다. 단순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좋은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게끔 바탕을 잘 만들어주고 싶다. 혼자만의 힘으론 불가능하다. 관심과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부분이다. 우승을 했다고, 이겼다고 해서 관심을 받는 건 이번으로 족하다. 여자축구가, 축구가 지속적인 애정을 받을 수 있도록 좋은 선수들을 키워내고 싶다.
불과 쉰 살의 나이에 머리가 허옇게 센 최덕주 감독에게 어린 여자 선수들과 함께 하려면 머리에 염색도 하고 그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염색을 해야 하는데 할 시간이 없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술, 담배는 전혀 못하지만 술 먹는 장소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는 최덕주 감독. 1시간 여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축구사들이 기자의 감정선을 쥐락펴락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주 매력적인 지도자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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