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 연예기획사 대표가 여고생 가수 지망생을 성폭행하고 나체사진을 찍어 협박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1월 16일 여고생인 가수 지망생을 성폭행하고 나체 사진을 찍어 협박한 기획사 대표 A 씨(30)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중소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는 A 씨는 지난해 4월 자신의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는 가수 지망생 B 양에게 “나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울며겨자먹기’로 이에 응한 B 양은 그 후 A 씨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A 씨는 4월부터 5개월여 동안 5차례에 걸쳐 B 양을 성폭행하고 나체 사진 등을 찍어 자신의 컴퓨터에 보관했다.
A 씨의 희생양은 B 양뿐만 아니었다. A 씨는 지난 2007년 9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연기 지망생인 C 양(22)과 D 양(24)을 같은 수법으로 성폭행하고 나체사진을 찍은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A 씨는 피해 여성들에게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스폰서가 필요한데 스폰서가 성관계 장면을 보길 원한다’며 성행위를 강요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스타가 되려면 성형수술비와 연습비뿐만 아니라 로비자금이 필요한데 이 금액이 어마어마해 스폰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A 씨는 B 양에게 200여 만 원을 받고 기획사 연습생으로 선발한 뒤 가수 연습은 일체 시키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B 양은 “몸매 관리는 잘 하고 있나. 검사를 해야겠다”며 성관계를 끊임없이 강요당해야 했다. 신변에 대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은 B 양이 한 여성인권단체에 상담을 요청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B 양은 경찰조사 과정에서 “반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었다”며 “연예인들은 다 거쳐야 하는 과정인 줄 알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A 씨는 “B 양 등에게 스폰서와 관련해 충분히 설명했고, 동의를 얻어 성관계를 맺은 것”이라며 성폭행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경찰은 압수한 A 씨의 컴퓨터에서 A 씨가 삭제한 10여 명의 나체 사진과 성관계 동영상을 추가로 복원해 수사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연예계가 다시 스폰서 사건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업계 관련자들 대다수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스폰서 사건은 일부 몰지각한 연예 종사자의 실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바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20여 년 전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며 “몰지각한 일부 중·소업체 대표들의 실수로 스폰서 논란이 가끔 이는데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연예 사업의 규모도 커지고 연예인의 위상도 높아지면서 업계가 투명하고 전문적으로 변해 현재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연예제작자협의회 관계자도 “과거에는 영화 등 제작 투자자들이 기획사에 노골적인 성상납을 요구하기도 했다”면서도 “일부 문제 업체들 때문에 연예계 전체가 더러운 것처럼 매도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연예계 스폰서 사건이 반복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일부 관계자들이 저지르는 일시적 일탈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스폰서 관련 사건들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2008년 3월 장자연 씨가 기획사 측이 자신에게 성상납을 강요하고 폭력을 일삼았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고 자살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다. 이 사건으로 연예계는 자체 점검에 나섰고, 자성의 목소리로 개혁을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난해 9월에 어김없이 스폰서 사건은 발생했다. “연예계에서 크게 뜨려면 스폰서가 필요하고 성상납을 해야만 투자를 받을 수 있다”고 강요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건은 장자연 씨 사건뿐 아니라 이번 사건과도 판박이다. 당시 기획사 대표 E 씨(32)는 지난해 2월부터 5월까지 전속 연습생에게 스폰서를 빙자한 성매매를 강요해 아버지 뻘인 스폰서와 10여 차례에 걸쳐 성관계를 맺어야 했다. 역시 ‘연예계 통과 의례’라는 이유가 붙었다.
Y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스폰은 연예계에서 ‘제도화’되어 버렸다. 스폰을 못받는 연습생들은 텔레비전 화면에 얼굴조차 내밀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라며 “탤런트 S 양 스폰서는 누구고, 가수 겸 MC인 H 양 스폰서는 누구라는 것은 업계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며 그 외 대다수가 스폰서가 있다”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이런 소식을 접한 연습생들이 ‘뜨려면 스폰은 필수’라고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며 “기획사에 몸 담은 5년 동안 수차례 지망생을 스폰서와 연결시켜줬다”고 털어놨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연습생들이 ‘스폰’을 관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렇다면 연예계의 고질병인 스폰서 논란이 계속 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연예 지망생들에게 돈을 많이 벌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는 연예계 데뷔는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지망생들의 절실함과 성매매를 원하는 재력가의 이해가 합치돼 스폰서 논란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연습생, 기획사 대표, 재력가인 스폰서로 이어지는 3각구도가 맞아 떨어져 스폰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취재 결과 이런 상황은 중·소형 기획사 중에서도 특히 아카데미형 기획사에서 더욱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본이 부족한 영세 엔터테인먼트는 연습생들을 데뷔시켜줄 능력이 부족해 스폰서를 잡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는 것이다. A 씨가 운영하던 논현동의 업체도 소위 ‘학원형’ 제도로 운영되는 아카데미 기획사였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T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아카데미 기획사는 보통 오디션을 볼 실력이 안되는 연습생들에게 50만~200만 원 정도의 가입비를 받고 기획사에 소속시켜 준다”며 “연습생들의 핑크빛 꿈을 미끼로 스폰서를 붙여 기획사가 돈을 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정상적인 기획사는 돈을 받아 데뷔를 시켜주거나 스폰서를 붙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스폰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현재 허가제로 혹은 등록제로 운영되는 기획사 제도의 장벽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탄탄한 기획사만이 연습생을 키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연예 지망생들 스스로가 ‘데뷔’라는 지름길에 현혹되기보다는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는 이성과 소양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선미 기자 wihts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