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풍 우려 속 당내 반발까지 ‘속전속결’ 물 건너가…8인 협의체 합의했지만 강성들 모여 진통 불가피
당초 더불어민주당은 8월이 지나기 전 본회의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속전속결로 밀어 붙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고의·중과실에 의한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가능하도록 하며 일정한 사유가 인정되면 고의·중과실을 추정토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민의힘과 정의당, 국민의당 등 원내 야당들은 법 개정안에 대해 ‘언론 재갈법’이라고 비판하며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의석 비중이 압도적인 더불어민주당은 개정안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여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풍에 대한 우려가 만만치 않았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법 개정안 자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싹트기 시작했다. 8월 26일 5선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궁극적으로 언론 자유를 크게 위축시킬 여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항의를 받은 기사에 대해 언론사나 포털사이트가 아무도 볼 수 없게 열람을 차단해야 한다는 열람차단청구권 신설에 대해서도 이 의원은 비판적 스탠스를 취했다. 이상민 의원은 “언론·출판 자유의 본질을 침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의원은 고의·중과실 추진 조항 삭제와 더불어 열람차단청구권 신설 규정 삭제를 제안했다.
검사 출신 재선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자신의 소셜미디어에서 언론중재법에 대한 소신발언을 했다. 조응천 의원은 8월 25일 “언론중재법 개정안 일부 조항은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언론 보도까지 위축시킬 위험이 분명 존재한다”고 했다. 조 의원은 “언론 개혁은 필요하다”면서도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절차와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언론중재법을 통해 목표로 했던 취지가 이뤄질 수 있도록 충분한 검토와 함께 당 차원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변호사 출신인 초선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8월 25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언론 활동에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논의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했다. 8월 30일 오 의원은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언론개혁법안 자체가 100점짜리냐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다면 사회적 토론을 더 해야 하며 토론 자체를 막아서도 안 된다”고 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물밑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와 관련한 여야 합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박 의장은 5차례에 걸친 여야 원내대표 회동을 이끌어내며 양극단으로 치달은 여야 이견을 중재하는 데 힘을 쏟았다. ‘중재의 달인’이라 불리는 박 의장이 정면으로 충돌하려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잠시 멈춰 세운 셈이었다.
결국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여야가 추천하는 전문가로 이뤄진 8인 협의체를 구성해 추가 논의를 이어간다는 합의안을 도출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더불어민주당이 입법 독주 논란 퇴로를 찾은 형국이라는 분석이 고개를 들었다. 여야가 9월 27일 본회의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를 연기하는 데 합의한 것과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도 환영 입장을 표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31일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여야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한 추가 검토를 위해 숙성의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을 환영한다”면서 “민주주의 기둥인 언론 자유는 국민 알권리와 함께 특별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로선 임기 막판 여당이 독주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대통령 레임덕 속도도 올라간다는 측면에서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면서 “문 대통령 역시 여야가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충분히 합의한 뒤에 언론개혁이라는 대의제를 추진해나가길 누구보다 원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야 정면충돌은 일단락됐지만 민주당 내부는 여전히 어수선하다. 파열음도 곳곳에서 들린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직설적인 메시지를 내고 있는 까닭이다. 8월 31일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언론도 특권의식을 내려놓고 제발 양심 좀 갖고 살자”고 했다. 정 의원은 “가짜뉴스, 허위보도로 인한 언론에 의한 피해는 다른 업종보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면서 “왜 유독 언론만 치외법권 지역에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가짜 뉴스로 얼마나 더 많은 국민이 목숨을 버려야 하며, 언론기업 탐욕에 얼마나 더 많은 국민이 고통으로 신음해야 하느냐”고 덧붙였다.
8월 31일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소셜미디어 글도 큰 논란으로 번졌다. 김 의원은 언론중재법 개정안 본회의 상정과 관련해 여야 합의를 주도한 박 의장을 겨냥해 “박병석 정말 감사하다. 역사에 남을 것”이라며 “GSGG”라고 했다. 김 의원이 언급한 GSGG라는 알파벳 조합이 ‘개XX’라는 욕설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됐다. 김 의원은 “GSGG는 ‘지도자는 일반의지에 봉사한다(Governers Serve General Goods)’라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여야가 합의한 8인 협의체도 삐걱거리고 있다.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방송협회, 한국기자협회, 한국여기자협회, 한국인터넷신문협회, 관훈클럽, 대한언론인회 등 7개 단체는 9월 2일 “언론 7단체는 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처리를 위한 들러리용 협의체에 불참을 선언한다”는 공동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8인 협의체는 구성부터 진통이 불가피해졌다. 국회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언론 학자나 전문가들은 8인 협의체 합류 제안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여기다 민주당이 8인 협의체 중 여당 의원 몫인 2자리에 ‘강성 친문’으로 분류되는 김용민, 김종민 의원을 배치하면서 여야 갈등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조수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조국 사수 부대원, 조국 대리인 말고 차라리 조국 씨를 투입하라”면서 민주당의 협의체 구성원 선정을 비판했다.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비판 보도를 막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다는 일각 주장을 반영한 비판으로 풀이된다. 정치권에선 언론중재법 개정안 관련 8인 협의체가 정상적으로 구성될지 여부에도 의문을 갖는 상황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검찰개혁이나 국정원 개혁 등은 정부 기관을 개혁하는 것이나, 언론개혁의 경우엔 민간 언론사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면서 “민주당이 파열음을 딛고 언론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지가 지켜봐야 할 대목”이라고 했다.
정치평론가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위원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취지는 허위보도를 지양하고 진실보도를 추구하는 것”이라면서 “허위와 진실이라는 단어 사이의 비대칭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채 연구위원은 “허위를 입증하는 것보다 진실을 입증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면서 “진실보도를 하려면 사실보도가 축적돼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채 연구위원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만 해도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30년가량이 걸렸다”면서 “그런데 진실이 드러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사실 보도가 있었다. 허위를 필터링하려 진실만 보도하게 되면 법 개정안이 의도한 것과 다르게 언론 보도의 다양성을 침해할 수 있으며 위헌 소지도 있다”고 했다. 그는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한 일련의 논란에 대해 “여당이 정의를 독점하려는 욕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내부적인 모순에 빠진 것 아닌가 하는 정황도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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