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아이돌(Idol). 1세대 아이돌에게 빠지지 않고 붙는 수식어다. HOT, 젝스키스, god, SES, 핑클 등 90년대 후반부터 2000대 초를 풍미한 아이돌 가수들이 어느덧 30대 초중반의 나이대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10여 년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룹 ○○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뗄 수 없다. 이는 평생 바꿀 수 없는 본적(本籍)과도 같기 때문이다.
1997년 ‘학원별곡’으로 데뷔한 그룹 젝스키스. 당시 HOT의 대항마로 제작된 이 그룹은 은지원 강성훈 이재진 등 다수 스타를 배출했다. 젝스키스가 활동한 기간은 고작 3년. 2000년 5월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이후 11년이 지났지만 소속됐던 멤버들에게 젝스키스와 관련된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은지원은 “3년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젝스키스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그만큼 임팩트가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돌이 영원할 줄 알았다”는 은지원이지만 정작 해체하자는 말을 한 이도 은지원이었다. 그는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을 때 떠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다른 멤버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을 꺼내기 힘들었을 거란 생각에 리더인 내가 총대를 메고 먼저 말을 꺼냈다”고 밝혔다.
1세대 아이돌 그룹 중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는 건 신화가 유일하다. god는 공식 해체 의사를 밝힌 적이 없지만 2005년 이후 앨범을 낸 적이 없다. 신화 역시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드물다. 각 멤버 별로 현재 위상이 다르고 의견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한 1세대 아이돌 그룹 출신 멤버는 “이벤트성으로 한자리에 모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장기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연습해야 하는 만큼 앨범을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최근에는 HOT가 막내 이재원의 전역식에 참석했다. 재결합설도 솔솔 흘러나왔다. 하지만 결국 무위에 그쳤다. 한 가요 관계자는 “5명의 스케줄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역에서 활동하는 멤버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고 꼬집었다.
10만 팬을 확보하고 있던 5인조 그룹이 해체되면 멤버당 최소 2만 명 이상의 팬은 가져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각 멤버들이 뭉치면서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괴리감이 생긴다. 이 관계자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그룹의 멤버들은 해체가 돼도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1세대 아이돌 멤버 중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과거의 명성에 기대 연예계에 ‘남아 있을’ 뿐이다”고 덧붙였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한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터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방글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젝스키스 시절 가장 많은 팬을 몰고 다닌 강성훈. 최근 잇따라 사기사건에 연루됐던 강성훈은 조직 폭력배에게 협박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한때 10대들의 우상이었던 강성훈이 사채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씁쓸함을 안겼다.
같은 시기 아이돌 그룹 NRG로 활동한 이성진은 사기와 해외 원정 도박 혐의로 피소됐다. 그는 2억 원의 도박빚을 갚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외에 HOT 출신 이재원과 젝스키스에 몸담았던 이재진은 각각 20대 가수지망생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와 군복무 중 탈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들은 대부분 그룹 해체 후 별다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연예계를 떠났거나 솔로 활동의 영향력도 미미했다. 하지만 일단 사건사고에 연루되면 파급력은 엄청나다. 그들이 누리던 인기가 워낙 대단했던 터라 언론은 앞 다퉈 보도하고 팬들의 실망감은 배가된다.
강성훈은 이번 사건이 불거진 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K 씨는 내가 연예인이라는 점을 알고 접근했다. 금전적 피해를 입은 것도 억울하긴 하지만 연예인으로서의 명예가 실추되고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속내를 드러내며 털어놓을 사람이 내겐 없었다”고 말했다. 별다른 연예 활동을 하지 않지만 얼굴이 널리 알려진 아이돌 출신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충이었던 셈이다.
왜 1세대 아이돌이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구설에 휘말리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자립심 부족이다. 10대 후반에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대부분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연예 활동을 시작한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나기 전 매니저 등 타인의 도움을 받다보니 세상 물정에 어둡다. 은행 업무 한 번 혼자 본 적이 없는 아이돌 가수가 수두룩하다. 때문에 일반인에 비해 사회성이 부족해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게다가 과거와는 사뭇 줄어든 수입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면 잘못된 길을 갈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아이돌 출신’이라는 점이 향후 활동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2004년 god 탈퇴 후 배우로 전업을 선언한 윤계상. 주연을 맡은 영화와 드라마도 5편이 넘는다. 하지만 아직 윤계상은 god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윤계상이 출연하는 작품의 제작발표회 혹은 시사회에서는 god와 관련된 질문이 나온다.
지난 2009년에는 한 잡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음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집안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아 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는 대목이 논란을 일으켰다. god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 때문. 소속사의 빠른 대처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윤계상은 god의 벽이 높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물론 ‘1세대 아이돌’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제 몫을 다하는 멤버들도 있다. 강타와 김태우는 보컬리스트로 자리매김했고 은지원은 힙합 뮤지션으로 탈바꿈했다. 양현석과 토니안은 건실한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며 수완을 발휘했다. 성유리 유진 등은 주연급 배우로 활약 중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과거와 같은 댄스 음악으로 신세대 아이돌과 맞설 궁리는 하지 않는다. 시대와 시류가 변했기 때문이다. 5년 만에 컴백한 김완선은 “과거와 같은 댄스를 보여주지 않을 거냐는 질문이 많다. 내가 아무리 힘 있게 춰도 현재 아이돌 가수들과 비교해 얼마나 힘 있게 보일지는 모르겠다”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은지원 역시 “요즘은 판도가 금세 바뀐다. 1주일 전에 1위를 했던 노래가 곧 사라진다. 아이돌 멤버들도 과거에 비해 더욱 당차졌다. 도무지 그런 흐름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고 고백했다. 아이돌 출신이라는 대중의 기억과 세월의 무게 사이에서 1세대 아이돌은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 realyo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