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KS 당시 배영수에게 마지막 등판기회 주려 ‘의도적 실수’로 마운드 초과 방문”
김 감독은 2015년 두산 사령탑에 오른 후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작성했다. 한국시리즈 우승 3회(통합 우승 2회), 준우승 4회를 기록했음에도 김 감독의 겨울은 따뜻하지 않다. 해마다 정들었던 선수들과의 이별은 물론 코치들도 팀을 떠나 다른 보금자리로 향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이런 모든 상황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가슴이 쓰라릴 때도 있지만 감독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1시즌을 8위에서 4위로 마감하고 포스트시즌을 치르며 마치 ‘도장깨기’ 식으로 키움(와일드카드 결정전) LG(준플레이오프) 삼성(플레이오프)을 거쳐 한국시리즈에서 KT와 맞붙었던 두산과 그 팀을 이끈 김태형 감독. 이강철 감독의 통합 우승을 지켜보며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냈음에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픔은 긴 여운으로 남았을 것이다. 1월 5일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김태형 감독을 만났다.
#‘도장깨기’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
두산 베어스의 2021시즌은 고단한 시간들이었다. 핵심 자원이던 전력 3명이 자유계약선수(FA)로 빠져나갔고 시즌 막판에는 외국인 선수 2명이 이탈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점점 성적이 떨어지던 두산은 9월 초 8위를 찍었다. 김태형 감독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감독 맡고 나서 8위를 기록한 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장’인 내가 선수들 앞에서 당황스런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나.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일부러 여유 있는 척을 했다. 부상 등의 이유로 전력에서 제외된 선수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만약 그때 성적을 내기 위해 투수를 당겨쓰고 무리해서 강공 작전을 펼쳤다면 한국시리즈까지 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전력이 갖춰진 상태까지 기다리다 전력이 갖춰지면 모든 힘을 발휘해 치고 올라가려고 했다. 이런 내 의중을 코치들, 선수들이 잘 이해해줬다. 경기 운영은 선수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것이다. 감독 혼자서 끌고 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144경기를 치르는 일정은 선수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준다. 김 감독은 “시즌 때 샤워장 들어가면 몸에 테이핑 안 한 선수가 없을 정도였다”면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지지만 일부러 모른 척해야 하는 게 감독의 숙명”이라고 정리한다.
#“최고의 라이벌은 바로 LG”
두산과 LG는 태생적으로 한 지붕 라이벌 팀일 수밖에 없다. 두산 선수, 코치, 감독으로 야구 인생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는 김 감독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상대 팀이 어디냐고 묻자 바로 LG를 꼽는다.
“감독 부임 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경기가 LG전이었다. LG와의 경기에선 무조건 이겨야 했다. 지난해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가장 신경 쓴 경기도 LG와의 준플레이오프였다. LG전은 자존심을 걸고 하는 터라 선수 때부터 꼭 이겨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11월 4일 열린 LG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김태형 감독은 두산이 1-0으로 앞선 5회초 정수빈이 기습 번트로 무사 1, 3루를 만들었다가 비디오 판독 결과 3피트 라인 수비 방해 아웃 판정을 받자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왔다. 강석천 수석 코치가 강하게 만류했지만 김 감독은 “항의하는 게 아니라 물어 보려고 하는 것”이라며 이영재 주심에게 다가갔다. 김 감독이 비디오 판독 결과에 항의할 경우 자동 퇴장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항의가 아니라는 걸 강조하면서 경기의 흐름을 끊었다. 김 감독의 노림수였다.
“당시 이영재 주심이 내게 나오면 퇴장이라고 말했고 나는 상황에 대해 묻는 거라며 다가갔다. 처음에는 정수빈이 1루에서 세이프됐다가 LG의 비디오 판독 요청 후 판정이 뒤바뀐 게 너무 아쉬웠다. 수빈이가 3피트 라인 수비 방해로 아웃됐다는 주심의 설명을 듣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류지현 감독이 나와 거세게 항의하더라. 당시 그 상황을 지켜만 보면 흐름이 LG한테 넘어갈 것만 같았다. 흐름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에 퇴장당하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2019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퇴장당한 경험이 있어 조심한 부분도 있다.”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두산의 승리로 끝났다.
#퇴장에 얽힌 ‘추억’과 배영수
2019년 키움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 6-1로 앞서가던 두산은 6회와 7회 연속 실점으로 6-6 동점을 허용했다. 두산은 9회 말 무사 1, 2루에서 호세 페르난데스가 투수 앞 땅볼로 주자가 2루와 3루로 향했다. 그러나 키움이 1루 3피트 라인 침범을 확인하고자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고, 페르난데스가 파울 라인 안쪽으로 달린 장면이 확인되면서 주자는 다시 1루와 2루로 돌아왔다.
김태형 감독은 이 결과에 거칠게 항의했고 이후 ‘비디오 판독 결과에 항의하면 퇴장을 명령한다’는 규정에 의해 더그아웃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김 감독은 “그때는 작정하고 나갔다”면서 “내가 퇴장 당해도 선수들이 잘할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김 감독의 퇴장 후 선수들은 집중력을 발휘했고 마침내 오재일의 끝내기 안타에 힘입어 키움을 7-6으로 꺾고 한국시리즈 첫 승을 거뒀다.
2019년 통합 우승을 이룬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 4차전 10회 말 연장전에서 배영수에게 마지막 등판을 맡긴 일화를 들려줬다. 마무리 투수 이용찬이 9회 말에 이어 10회 말 마운드에 올라갔는데 이후 마운드 방문 횟수 초과로 투수 교체를 해야만 했다. 김 감독은 주저 없이 배영수를 올렸고 배영수는 박병호와 제리 샌즈를 각각 삼진과 투수 앞 땅볼로 처리하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 ‘피날레 투수’가 됐다. 이 경기를 끝으로 배영수는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했고,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칭송을 받았다.
김 감독은 당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배영수한테 마지막 등판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경기가 팽팽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기회를 찾지 못했다. 10회 초 우리가 2점을 추가했고 잘하면 10회 말 수비 때 기회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용찬이 너무 잘 던지더라. 그때 정식으로 타임 요청해서 투수 교체를 했다가 점수를 내주면 파장이 클 것 같아 실수하는 척하면서 그라운드 안에 발을 넣다가 뺐다. 주심이 마운드 방문 횟수 초과라며 무조건 투수를 바꿔야 한다고 말해 이용찬을 내리고 배영수를 올린 것이다. 다행히 배영수가 이닝을 잘 마무리하면서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림이 되려면 그렇게 해도 스토리가 만들어지더라.”
#‘두목곰’이 눈물을 흘린 이유
감독 부임 후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다 보니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상대 팀 감독 관련해 다양한 추억이 있다. 그중 김 감독은 2016년 맞붙었던 NC 다이노스의 수장 김경문 감독을 잊지 못한다.
“김경문 감독님은 두산에서 형과 동생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다. 어렸을 때부터 코치로, 감독님으로 모신 사이인데 내가 감독이 되면서 김경문 감독님을 상대 팀으로 만나게 됐다. 2016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됐을 때 감독님이 오셔서 내 손을 잡고 뒤돌아 가시는데 그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승부의 세계가 참으로 냉정하다는 걸 새삼 느끼면서 인터뷰 중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더라.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감정이 올라온다. 그 순간에는 나와 김경문 감독님만 아는 감정이 존재했다고 본다.”
김경문 감독이 도쿄올림픽 야구대표팀을 이끌며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을 때 김 감독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이, 기자들이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건 미디어의 역할이니까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고 봤다. 하지만 현장 경험이 없는, 코치도 안 해본 야구인 후배들이 김경문 감독님에 대해 전력분석이 어떠하니, 선수 구성이 어떠했느니 하며 말하는 게 불편했고 안타까웠다. 김경문 감독님은 단 한 번도 타인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쉽게 내치지 못하는 부분들로 인해 본인이 오해를 받고 고초를 당해도 묵묵히 감내하신다. 그래서 김경문 감독님을 존경한다.”
#FA로 떠난 선수들과 양의지
두산은 해마다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의 타 팀 이적이 활발한 편이다. 이번에도 박건우가 NC 유니폼을 입게 됐다. 감독 입장에선 이런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선수의 이탈은 김 감독에게 쓸쓸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괜찮다고 애써 위안 삼으려 해도 선수의 이탈은 아픔으로 다가온다.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이탈이 양의지였다. 의지는 광주진흥고 시절부터 지켜봤던 포수이고 두산 입단 후 코치로 만나 모질게 가르친 선수라 정이 많이 들었다. 생김새도 우리 아들과 비슷해 아내도 의지를 좋아했을 정도다. 의지가 좋은 대우를 받고 팀을 옮긴 건 축하할 일이었지만 부재의 여운이 오래갔다. 감독은 이렇게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직업인 것 같다.”
흔히 두산 야구를 ‘화수분’ 야구라고 평한다. 팀 별명은 ‘어우두(어차피 우승은 두산)’다. 그런 팀을 이끄는 감독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을까. 김 감독은 “예기치 못한 부상 선수가 나오면 오더(라인업) 짜는데 밤을 새우기 일쑤”라면서 “선수를 2번에 넣느냐, 3번에 넣느냐를 두고 종이만 수십 장을 바꿔 쓴 적도 있다”고 토로한다.
감독 자리가 외롭지 않느냐고 묻자 김 감독은 “그만큼 대우해주니까 참고 하는 것”이라며 현실을 직시한다. 그럼에도 경기 마치고 혼자 야식을 먹을 때면(코치들한테 밥 먹자고 하는 것도 불편할 수 있기에) 감독 자리의 무게를 절감하게 된다.
김태형 감독은 2022년을 끝으로 두산과의 재계약이 마무리된다. 과연 두산은 시즌 중 김 감독과 재계약에 이르게 될까? 몹시 궁금할 따름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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