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전통복 우기며 은근슬쩍 한복 강탈…문체부 장관은 “정식 항의할 생각 없어”
지난 4일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는 한복을 입은 여성이 중국 국기를 전달하는 중국 내 56개 민족 대표 가운데 한 명으로 출연했다. 반짝이는 재질의 분홍색 치마와 흰색 저고리, 착용자의 나이와 맞지 않는 배씨댕기까지 현재 한국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한복 대여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이에 국내 네티즌들은 "전세계인들이 보는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국인의 전통의상을 중국 소수민족의 의상으로 둔갑하는 문화침탈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며 거센 비판을 쏟아냈다. 중국의 한국계 소수민족으로 분류되는 조선족은 일제강점기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의 후손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에 변화된 한복 등 한국 문화는 조선족과 관계가 없으므로 이를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로 묶어서는 안 되며, 일부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이미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 왔던 '한국'계의 문화이지 '중국' 문화의 하위로 수용될 수 없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중국이 한국의 문화를 조선족과 연관시켜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로 주장해 온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예컨대 1978년 창시된 사물놀이나 이미 한국이 유네스코에 등록한 판소리, 김장 문화, 강강수월래 등을 중국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시도하거나 자국 연예프로그램 등을 통해 이 같은 한국 문화가 중국의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유포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특히 한복의 경우는 중국이 고려의 영향을 받았던 사실을 고의적으로 삭제하고 "명나라에서부터 전해진 중국의 전통복장을 한국이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라며 인터넷상에서 한국 네티즌들과 격론을 펼치곤 했다. 이 같은 중국의 주장은 2019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킹덤'을 통해 한복과 갓 등 한국의 전통 복식에 해외 네티즌들이 큰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 대중들은 중국의 이 같은 문화침탈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 온 바 있다.
이런 가운데 결국 우려하던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까지 중국의 의도가 드러나면서 여·야는 한 목소리로 비판하며 정부의 강경한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5일 황규환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주권국가에 대한 명백한 '문화침탈'이자 '함께하는 미래'라는 이번 올림픽의 슬로건을 무색케하는 무례한 행위"라며 "대체 대한민국을 얼마나 우습게 알면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올림픽 개막식에서 문화공정을 보란 듯이 펼쳐 보일 수 있는가"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은 이전부터 한복을 '한푸'라 칭하며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했고, 아리랑을 자신들의 국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 홍보영상에는 상모 돌리기와 한복을 등장시켰으니 어제의 장면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며 "우리 정부는 중국몽(夢)에 사로잡혀 중국의 동북공정과 문화침탈에 대해 제대로 된 항의조차 하지 못했고, 오히려 각종 외교 사안에서는 늘 저자세를 유지해 왔다. 단호한 대응이 있었다면 어제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 대변인인 이소영 의원도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실리외교를 추구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 문화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문화공정을 벌이는 데에 침묵할 수는 없다"며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서 우리 국민의 반중 정서가 날로 강해진다면 앞으로 중국과의 외교를 펼쳐 나갈 때에도 커다란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대선주자들도 앞다퉈 중국을 비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5일 경남 창원 현대로템 공장을 찾은 자리에서 "중국은 최근 문화공정이라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국으로서 과연 이래야 되느냐'는 의심이 들 정도로 납득하기 어려운 정책이 시행되는 듯 하다"라며 "김치, 한복, 심지어 특정 세계적인 스타 연예인이 어디 출신이라고 할 정도로 문화공정이라고 하는 것이 심각하게 우리의 자존심을 훼손하고 있다. 축제가 열리는 시기이긴 한데 축제의 시간을 문화공정의 시간으로 삼지 않는가 하는 일각의 의문을 중국 정부는 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이날 오후 제주 해군기지가 있는 강정마을을 방문한 뒤 기자들과 만나 "고구려와 발해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이며 남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중국이 추진한 동북공정을 비판한 것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 역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한국은 대한민국 문화다. 중국 당국에 말한다. 한푸(漢服)가 아니라 한복(韓服)이다"라고 일침을 놨다. 최근 중국이 전통 복장으로 알려졌던 치파오를 탈피하고 한복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한푸를 자신들의 전통 복장이라고 새롭게 내세워 온 것을 지적한 것이다.
문제의 개회식에 참석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날 중국 베이징 시내 메인 미디어센터에서 기자들을 만나 "소수민족이라고 할 때는 그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경우를 주로 말한다"라며 "한국은 (중국) 바로 옆에 세계 10위권 큰 나라로 존재하고 있는데 양국 간 좋은 관계에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문화가 이렇게 많이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 봐도 물리력 없이 소프트파워로 문화를 평정한 유일한 경우"라며 "우리 문화가 확산하는 과정으로 보고 자신감, 당당함을 가질 필요가 있고 다만 올바로 잡을 부분은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외교적으로 항의를 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그럴 필요까지는 현재 생각 안 하고 있다"며 한 걸음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황 장관은 양국에 오해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 중국 체육장관 등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국내 여론을 언급하는 다소 소극적인 대책을 취할 입장을 밝혔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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