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데뷔 20년 차 배우 이기우는 촬영이 없을 때면 전국을 누비는 여행 마니아다. 여행의 묘미란 '낯설어지는 것'이라는 그에게 숲은 단연 최고의 여행지다.
굽이굽이 물결치는 능선을 넘나드는 바람, 아름드리 고목 사이로 비추는 햇살, 하다못해 숲길에 찍힌 발자국 하나까지 처음의 것과 같은 것이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낯선 숲길에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린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후회의 순간들 그리고 외면했던 내 안의 목소리다.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시골에서 생활하는 '5도 2촌'은 옛말, 이젠 '5도 2숲'이 뜬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위치한 한 캠핑장은 약 1만 9800㎡의 숲에 둘러싸여 '숲 살림'을 꿈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담장이 없으니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서로 보듬어 키우고 자연의 놀 거리가 지천으로 깔려있어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저마다의 삶을 살다가 주말이면 숲에 모여 자연과 교감하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도시에 살며 숲을 동경하다 아예 숲속으로 이사를 온 지 11년 차인 레스 팀머멘즈, 김수진 부부. '숲과 호수의 나라'라고 불리는 캐나다에서 온 남편 레스 씨는 고향의 숲과 달리 완만한 능선이 끝없이 펼쳐진 한국의 숲에 한눈에 반했다.
부부는 그들이 운영하는 양조장까지 종종 숲길을 이용해 출근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다. 도시에서의 출근길은 '버리는' 시간이었다면 지금은 부부의 삶을 '채우는' 시간이 된 셈이다.
오대산이 품고 있는 천년고찰 월정사. 수령 500년이 훌쩍 넘은 전나무 1700그루가 산문(山門)처럼 서 있다. 전나무 숲길에 부는 바람은 이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서 바지런히 속세의 때를 벗겨낸다.
월정사의 월엄스님은 전나무 숲길과 인연이 깊다. 어느 날 전나무 숲길을 걷다가 쓰러진 전나무와 잡초를 보고 인생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싶어져 출가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평화로움이 스며드는 오대산의 전나무 숲길은 사실 남모를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전나무만큼이나 소나무가 우거져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목재 수탈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조선총독부 산하 목재회사가 존재했으며 오대산 선재길 일대에는 목재 반출용 수레를 위해 설치한 목차(나무 짐칸) 레일도 10m가량이 남아있다. 목재를 운반할 때 동원됐던 화전민들이 부른 노동요인 ‘목도 소리’ 또한 오대산 일대에서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창강을 따라 숲을 거닐 수 있도록 조성된 평창남산산림욕장.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숫자가 적힌 명찰을 달고 있는 나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두 일제강점기 당시 송진채취의 피해를 겪은 소나무다.
13세의 나이로 송진 채취에 강제 동원되었던 김시호 씨(94)는 평생 남산을 지척에 두고 살며 마음의 빚으로 괴로워했다. 1m가 넘는 깊은 상처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송진 채취 목을 보며 '고맙다'고 말하는 김시호 씨다.
김군섭 씨는 숲의 탄생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1976년 당시 평창군청 산림과에서 일하던 그는 대관령 특수조림을 담당했다. 초속 40m의 강풍이 불고 겨울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민둥산은 나무가 자라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그러나 나무를 심고 주위에 통발을 세워 보호하고 통나무 방풍책을 세워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를 수십 번 되풀이한 끝에 300ha가 넘는 울창한 숲을 조림할 수 있었다. 사람이 지켜낸 나무들은 5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울창한 숲을 이루어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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