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동백림 간첩단 등 주요 시국사건 변론…사회운동에 힘쓰며 여러 저작 남기고 일요신문 연재도
1934년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태어난 한 전 원장은 전주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정치학과를 나왔다. 1957년 8회 고등고시 사법과(사법고시)에 합격한 한 전 원장은 1960년 임관해 법무부 검찰국, 서울지검 검사 등 연이어 요직에 발탁됐다. 하지만 ‘검사 옷이 맞지 않는다’면서 5년 만인 1965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평소 독서를 즐겨하던 한 전 원장은 개업 후 작가들의 변호를 주로 수임했다. 그러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한 사건을 맡았다. 이른바 ‘분지 필화사건’이다. 작가 남정현이 쓴 소설 ‘분지’에 정부가 ‘반미용공’이라며 수사에 착수했고, 결국 작가가 구속되자 한 전 원장은 변론을 자처했다. 시국 변호사로서의 첫 걸음이었다.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1974년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 박정희 정부가 조작한 시국 사건 법정엔 어김없이 한 전 원장이 나타났다. 한 전 원장은 1970년 ‘오적 필화사건’ 변호로 특히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시인 김지하는 박정희 정부 부정부패 주범들을 ‘오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행태를 풍자한 시를 발표해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된 바 있다.
반공조작 사건 피해자, 양심수 등을 변론하던 한 전 원장의 첫 시련은 1975년 닥쳤다. 1969년 유럽간첩단 사건 때문이었다. 1969년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는 김규남 등을 간첩 혐의로 기소했고, 법원은 이들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김규남 등은 1972년 사형 집행을 당했다.
한 전 원장은 1972년 김규남을 애도하는 수필 ‘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서-어떤 조사’를 한 월간지에 발표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975년 한 전 원장 등을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한 전 원장은 “사형 집행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쓴 것”이라며 당당히 자신의 뜻을 펼쳤다.
이로 인해 한 전 원장은 1심에서 징역 1년 6월, 2심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또 8년 5개월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한 전 원장은 2019년 6월 27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당시 수감 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내가 1975년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많은 시위 학생들이 잡혀오고 했죠. 그런데 같은 층 옆방에 어떤 학생이 잡혀왔다고 해서, 한여름인데 얼마나 땀 흘리고 힘들겠어요. 그래서 제 메리야스, 내의를 교도관 통해서 옆방에 보내줬죠. 그게 누구인지 이름이나 그런 건 알 바가 아니었고 다만 경희대 학생인지 데모를 하다 잡혀왔다 하는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석방된 후 부산 가서 노무현 변호사 만나는 자리에서 문재인 변호사를 만났는데, 자기가 바로 그 메리야스 내의를 받은 문재인이라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마나 참 반갑고 감격스럽고…. 그런 사이였어요.”
유럽간첩단 사건은 2015년 재심을 거쳐 무죄로 판결났다. 한 전 원장도 재심을 청구, 2017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한 전 원장은 “기쁨보다는 착잡함이 더 크다. 아직도 저처럼 정치탄압의 대상으로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분들이 많은데 앞으로 어떤 독재 권력도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 전 원장은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도 연루돼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한 전 원장 소신은 꺾이지 않았다. 한 전 원장은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 민중교육지 필화사건, 문익환 목사·임수경·황석영 방북 사건 등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국사건 변호를 맡으면서 군사정권에 저항하고 인권을 지키려했다.
한 전 원장은 노무현 정부 사법제도 개혁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던 2006년 12월 31일 일요신문 인터뷰(관련기사 [인터뷰] 회고록 발간 한승헌 사개추위원장)에서 인권 변호사로서 살아왔던 것에 대해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 고통이 심했다. 그래도 내가 옥중에 있을 때는 지인들이 도움을 주셔서 가족의 생계는 해결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한번은 ‘아버지가 감옥에 있으면 명절 때 선물이 많이 들어오는데 석방되어 집에 있을 때는 선물이 줄어든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했다.
법정 밖에서의 한 전 원장은 사회운동가였다. 1988년 군사정권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모여서 준비하던 한겨레신문의 창간위원장을 맡았고, 같은 해 5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발족에도 참여했다. 한 전 원장이 진보진영 저변 확대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전 원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감사원장을 지낸 뒤 노무현 정부 때는 사법제도 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엔 변호인단으로 활약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2012년엔 캠프 통합정부 자문위원장으로 임명됐다. 평소 ‘사법부의 탈권위’를 외쳤던 한 전 원장은 2018년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평생을 법과 함께 살았던 한 전 원장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문학’이다. 한 전 원장은 변호사 개업 다음 해인 1961년 시집 ‘인간귀향’을 시작으로 2018년 ‘갈망의 노래’까지 30편이 넘는 작품을 출간한 작가였다. 전공 분야인 법률 서적뿐 아니라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서적을 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한 전 원장 시에 대해 “전통적인 서정시와 난해한 모더니즘 전성기에 형성되었으면서도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창성을 돋보이게 했다”며 호평했다.
한 전 원장은 일요신문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1997년 ‘정치재판의 현장에서’라는 제목의 연재물을 통해 중요한 시국사건 51건의 전말을 소개했다. 2004년 11월부터 2005년 5월까지는 ‘한승헌 변호사의 시국사건 실록’을 연재했다(관련기사 제1화 시대의 파편 맞은 두 문인). 일요신문은 ‘불행한 조국의 임상노트(1997년)’ ‘법이 있는 풍경(2000년)’ 등 두 권의 한 전 원장 책을 출간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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