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신재민 전 차관, 이국철 회장 |
현재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권력형비리 의혹 사건은 크게 부산저축은행 사건과 ‘이국철 폭로’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여권실세와 검찰 거물급이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의 수사 의지에 따라 대형 권력형비리 사건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먼저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김두우 전 수석을 구속하면서 다시 탄력을 받는 듯 했다. 여기에 박 씨의 측근들이 <일요신문>을 비롯한 일부 언론을 통해 박 씨가 접촉했던 정관계 및 법조계 거물급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박태규 신 리스트’가 수면위로 급부상했다.
급기야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지난 4일 대검찰청을 대상으로 한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해 안상수 한나라당 전 대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이윤호 전 지식경제부 장관, 신재민 전 문화부 차관, 정정길 전 청와대 대통령실장, 이동관 청와대 언론특보, 김두우·홍상표 전 홍보수석비서관 등이 박 씨와 접촉했다고 폭로했다. 박 의원은 또 이 대통령의 사돈인 조석래 전 전경련 회장과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도 박 씨와 밀접한 관계라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이날 부산저축은행 사건은 당·정·청과 재계, 지방정부가 연관이 있는 ‘이명박 정부의 권력형 로비게이트’라고 규정하면서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는 더 이상 확전되지 않고 김 전 수석을 구속기소하는 선에서 마무리절차를 밟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검찰은 부산저축은행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받았던 김종창 전 금융감독위원장을 사실상 ‘혐의 없음’으로 결론내리는 등 금융당국 관계자들에 대한 수사도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또 박 씨가 구명로비 대가로 박원호 금융감독원 부원장에게 수천만 원의 금품을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사법처리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로비 금액과 대가성 여부 등에 대한 당사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고, 박 부원장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어 소환 여부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신 리스트’로 거론된 인사들에 대한 수사는 착수조차 못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검찰은 박 씨가 이들에게 청탁과 함께 로비를 했다는 구체적인 진술을 하지 않았고, 혐의를 입증할 뚜렷한 정황 증거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사 착수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사건 관계자의 구체적 진술이 없더라도 제3자의 발언이나 구체적인 주변 정황만으로도 추가 수사가 가능하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실제로 ‘박태규 신 리스트’는 박 씨 측근들의 구체적인 진술을 바탕으로 일부 언론이 공개하면서 수면위로 부상한 상태다. 검찰 또한 박 씨 측근들을 참고인 신분으로 잇따라 소환조사하면서 ‘신 리스트’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정치권은 검찰이 서둘러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마무리 국면으로 전환하고 있는 배경에 강한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일각에선 여권 실세와 검찰 거물급이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가 수사 범위를 놓고 빅딜을 시도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 로비스트 박태규 씨가 지난 8월 31일 밤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구치소로 이송되고 있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현 정권 실세들에 대한 금품 제공 의혹을 폭로한 이국철 회장 사건의 수사 방향도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 13일 네 번째 검찰에 소환된 이 회장은 “검찰 조사 방향이 이상하다. 수사의 목적이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검찰 수사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신 전 차관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검찰이 변호인 같다”며 “나는 수사할 수 있는 자료를 다 줬다. 불법기획 수사에 대해 명확히 수사하지 않으면 비망록을 오픈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이 회장은 “비망록 안에는 신 전 차관과 박영준, 곽승준, 임재현이 아무도 모르게 어딜 다녀온 이야기, 검찰 이야기 등을 아주 상세히 적어놨다”며 “때가 되면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차장과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임재현 청와대 정책홍보비서관은 이 회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상태다.
검찰은 핵심 당사자인 이 회장과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을 지난 13일 동시에 소환해 대질신문을 통한 사실 확인 작업을 시도했으나 신 전 차관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검찰은 이날 두 사람을 상대로 밤늦게까지 조사를 했지만 이 회장은 신 전 차관에게 10년간 10억 원 이상의 현금과 상품권, 법인카드, 차량 등을 제공했다고 주장한 반면 신 전 차관은 명절 상품권 수수와 카드사용액 일부만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이 회장이 신 전 차관에게 건넸다는 5000만 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 중 2000만 원어치에 대한 자료를 제출받아 조사한 결과 실제 상품권 사용자는 신 전 차관과 무관한 SLS그룹 관계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검찰은 SLS그룹 관계자가 이 회장으로부터 모처에 ‘인사용’으로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상품권을 받았고, 이 관계자는 일부만 모처에 뿌리고 나머지는 본인의 사적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사업가 김 아무개 씨에게 직접 건넨 2억 원 중 수표 1억 원은 검찰 고위층에 전달됐다’는 이 회장의 주장에 대해서도 검찰은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 검찰은 이 회장의 주장과 달리 애초 1억 5000만 원은 이 회장 개인계좌에서 김 씨 회사 계좌로 송금됐고, 5000만 원은 수표로 입금됐다며 오히려 이 회장이 사실과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경위를 추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폭로자인 이 회장에 대해서는 강도 높은 수사를 전개하고 있는 반면 신 전 차관을 비롯한 여권 실세들에 대해서는 수사 흉내만 내고 있는 분위기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검찰이 ‘10억대 금품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신 전 차관을 ‘무혐의’ 처리하고 박영준 전 차관 등 또 다른 실세들에 대해서는 아예 소환도 하지 않고 수사를 마무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는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각종 측근비리 및 대통령 친인척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레임덕에 직면한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가 핫라인을 통해 비리 사건 수사를 물밑 조율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지난 13일 검찰에 네 번째로 출석한 이 회장이 “수사방향과 목적·결과를 정해놓고 내 진술의 신빙성을 공격할 자료를 축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과연 검찰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권력형비리 의혹 사건에 대해 한 점 의혹 없이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