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북사업의 간판 김윤규 부회장의 퇴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사진은 2003년 8월 김 부회장이 고 정몽헌 회장 영결식에서 약력을 낭독하는 모습. | ||
고 정몽헌 회장 사망 이후 현정은 회장이 그룹총수직에 오르면서 현정은-김윤규 갈등은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지난 2003년 12월 그룹인사에서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옷을 벗은 반면 김 부회장은 자리를 지켰다. 구 가신그룹 3인방 중 유일하게 김 부회장이 자리 보존을 했던 것은 대북사업에서 그가 가진 상징성 때문이었다.
당시 인사를 통해 현 회장은 최용묵 현대경영전략팀장,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 등 신 실세그룹에 힘을 실어주면서 내부 결속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정주부에서 일약 대북사업을 총괄하는 대기업의 총수직에 앉은 현 회장으로서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대북사업 간판 역할을 해온 김 부회장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란 관측이 계속해서 나돌았다.
‘마지막 가신’ 김윤규 부회장의 퇴장을 알리는 전주곡은 지난 3월 현대아산 이사회에서 흘러나왔다. 윤만준 상임고문이 사장직에 오르면서 당시 사장이었던 김 부회장이 부회장 승진을 하게 된 것이다. 외형적으로 승진이었지만 이때부터 김 부회장의 업무영역은 대외업무로 한정됐다. 반면 윤 사장이 자금·인사·신규사업추진 등 회사의 중요 결정권을 장악하며 계열사 사장단 회의 참석이나 현대아산 임원회의 주재도 모두 윤 사장 차지가 됐다.
이 무렵 김 부회장은 ‘현대건설 인수 희망’ 발언을 해 묘한 파장을 낳았다. 옛 현대왕국 부활의 기치를 들어 축소된 입지를 회복하는 전기로 삼으려한다는 관측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지난 6월 금강산관광 1백만명 돌파 기념 기자회견 때는 “대북사업은 이제 시작단계”라며 자신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주변에선 “현 회장 혼자 대북사업 하기 어려울 것이란 메시지를 주려 한 것”이란 분석이 나돌았다.
이런 여러 얘기가 나돈 이유는 올 초부터 김 부회장의 퇴진론이 현대그룹 안팎에서 나돌았기 때문이다. 현 회장의 ‘가신 축출’에 대한 ‘결심’이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닌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김윤규 퇴진론’은 3월 주총에서 그를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며 ‘속도조절’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 7월 현 회장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면담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게 재계 안팎의 공통된 관측이다.
김 위원장이 현 회장을 남측 대북사업 창구로 공식 천명하면서 김 부회장의 설 자리가 좁아졌다는 것이었다. 맏딸인 정지이 현대상선 과장의 대외 지명도 상승도 김 부회장 역할 축소에 한몫했다는 평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정지이 과장에 대한 관심 표명이나 정지이씨가 현 회장 측근 역할을 한다는 사실 등이 현대관계자들을 통해 알려지면서 정주영-정몽헌 회장을 이어받은 현 회장 나름의 오너십에 대해 북에서도 인정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현대그룹의 현대아산에 대한 감사설이 흘러나온 것도 이 무렵부터다. 현 회장 방북 직전부터 현 회장 측근세력이자 구조조정본부장격인 최용묵 현대경영전략팀장의 주도 하에 김윤규 부회장에 대한 감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통일부와 국정원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7월 초부터 현대아산에 대한 그룹차원의 감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 지난해 8월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 2010 비전 선포식에서 그룹깃발을 흔들고 있다.맨 왼쪽에 김윤규 부회장의 모습도 보인다. | ||
그렇다면 김 부회장을 이토록 코너에 몰아넣은 비리혐의는 과연 무엇일까. 금강산 사업 추진과정에서 지인에 대한 특혜 제공, 북한에서의 불법 달러 유출 등이 재계 인사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김 부회장 사생활에 대한 미확인 소문까지 나도는 실정이다.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현대그룹측은 “대북사업 과정에서 (김 부회장이 저지른) 절차상 오류가 있었다”고만 밝힐 뿐 정확한 내용은 밝히지 않고 있다. 그룹관계자는 “(김 부회장 비리사실에 대한) 보도내용은 추측일 뿐”이라 일축했다.
이번 파문이 불거진 직후 현 회장은 그룹차원의 감사 대상이 현대아산이었지 김 부회장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재계에선 현 회장의 칼날이 현대아산이 아닌 김 부회장을 향해 서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의 진행과정을 돌이켜보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김 부회장의 ‘버티기’가 사안을 키운 측면이 있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번 김 부회장 비리 파문과 관련해 현대그룹측은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를 만한 비리는 아니다”고 못박은 바 있다. 그러나 사법처리 대상도 아닌 김 부회장 퇴진론이 올 초부터 정치권에까지 소문날 정도였다는 것은 그만큼 현 회장측의 감사가 전방위적이었을 것이란 추측을 낳게 한다. 작정을 하고 빼든 칼이었다는 지적이다.
현대그룹 안팎에선 이미 김 부회장의 대표이사직 박탈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김 부회장 거취 문제에 대해 그룹관계자는 “곧 정리될 것”이라며 김 부회장의 대표이사 퇴진을 우회적으로 암시했다. 이 관계자는 “아직 공식적인 감사가 끝난 것이 아니다”며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 밝혔다. 이는 곧 김 부회장의 자진 사퇴를 종용하는 ‘물밑 공세’로 비치기도 한다.
이제 시선은 김 부회장에게로 향하고 있다. 김 부회장 주변에선 “명예롭게 물러나려 할 것”이란 관측이 있는가 하면 “백의종군해 대북사업에 계속 참여하려 할 것”이란 상반된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김 부회장이 현 회장의 공세에 밀려 구 가신그룹의 뒤를 따를 것이란 관측이 우세한 편이다.
한편 현 회장과 김 부회장의 알력이 이번 김 부회장 비리 파문을 불러왔을 것이란 정·재계의 관측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게 말이 되는가”라며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