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도 개업도 못하는 사회 분위기…두 번 망하고 성공한 시미즈 씨 화제, 도쿄도 재창업 행정지원
미용사 시미즈 슈지 씨는 1998년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숯 성분을 활용한 ‘새까만 샴푸’를 개발한 것. 세정력이 뛰어나면서도 두피 관리까지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샴푸였다. 처음엔 ‘소비자들이 까만색을 꺼려할 것 같다’며 어디서도 취급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TV에 소개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한 해 매출액이 무려 3억 엔(약 29억 원)에 달했다.
시미즈 씨는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사업이 성공을 거두자 ‘뭐든 내가 하는 것이 맞다’라는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회고했다. 2000년에는 과감하게 미국 뉴욕으로 진출한다. 아무 목적도 없이,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온 가족이 이주했다. 집 월세는 50만 엔. ‘성공한 사업가’라는 도취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하지만 사업은 단숨에 내리막길로 향했다. 제품을 일본에서 공수하자니 한 병에 50달러(약 6만 4000원)나 들었고, 비싸서 전혀 팔리지 않았던 것. 현지 업체에 제조를 의뢰했으나 품질이 기대 이하였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3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온다.
샴푸 판매 기세는 이미 꺾인 상태. 재기를 노리고 개발한 것이 샤워기 헤드였다. 헤드 안에서 대류(對流)현상을 일으켜 세정력을 높인 제품으로, 판로를 개척해 TV홈쇼핑에서도 판매할 기회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도박을 걸자’고 생각해 재고 준비에 모든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떠안은 재고 부담으로 회사는 2015년 도산에 이른다.
시미즈 씨는 “경영 스킬이 부족했고, 태만한 경영과 판단 미스 축적이 실패의 원인이었다”며 반성한다. 당시엔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월세와 직원들의 월급, 대출 이자 등 매달 돌아오는 월말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우울증이 발병해 1년간 집안에만 틀어박히게 된다. 75kg이던 몸무게는 55kg까지 줄었다. 악몽에 시달리고, 빚쟁이들의 환청이 들려와 떨고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전환점은 불현듯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문밖을 나서자 왠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다시 일해야 하지 않을까. 문득 자녀들에게 괴로운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시미즈 씨는 “원점으로 돌아가 미용사로 일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취직한 곳은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대형 체인 미용실. 외국인 손님의 방문이 많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고민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짚을 수 있는 안내판을 만들어 ‘어떤 머리를 하고 싶은지’ 등을 소통하면서 커트를 했다. 이를 고마워하는 외국인이 적지 않아 좋은 평판을 만들어냈다.
미용사로 다시 일어선 시미즈 씨는 2019년 새로운 회사를 설립, 외국인을 위한 미용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순항 중이라고 한다. 그는 NHK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7년 전 도산했을 땐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당시 나는 독불장군이었고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하지만 도산을 겪으면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실패는 끝이 아니며, 분명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도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유독 강하다. 한번 실패하면 대출을 받기 어려운 문제도 있지만, 재기하는 데까지 본인이 극복해야 할 정신적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또한 재기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어려운 것도 과제로 꼽힌다.
NHK에 따르면 “일본의 폐업률은 3.3%로 미국과 영국의 절반을 밑도는 수준”이라고 한다. 언뜻 낮아 보일 수 있으나, 문제는 ‘개업률’ 역시 5.1%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절반 이하에 그친다는 점이다. 즉 경영이 어려워도 좀처럼 폐업을 단행하지 못하는 대신, 새로운 기업도 생겨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중소기업청은 “폐업도 경제 활성화에 필요한 요소”라고 지적한다. “사업승계나 기업의 개·폐업 같은 신진대사를 통해 중소기업이 쌓아온 기술과 인력을 차세대에게 인계하면서 침체된 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을 도모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런 가운데 행정 지원이 시작됐다. 일례로 지난 3월 도쿄도는 ‘비즈니스플랜 발표회’를 열었다. “임산부도 안심하고 입을 수 있는 드레스를 만들고 싶다.” “손톱만 다듬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도 줄여주는 네일살롱을 실현하고 싶다.” 도쿄도가 진행하고 있는 ‘재창업을 목표로 하는 경영자 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행해진 발표회다. 이날 참가자들은 모두 도산이나 사업 실패를 겪어본 사람들로 알려졌다.
관련 프로젝트는 도산 경험을 되돌아보고, 부족했던 점을 반성하는 등 자신의 견해나 생각을 바꾸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실패한 경험을 자양분 삼아 재창업을 목표로 하는 경영자에 대해서는 ‘비즈니스플랜 책정 상담’ ‘투자가와의 면담’ 등의 지원이 이뤄진다.
도쿄도 담당자는 “흔히 도산이나 폐업이라고 하면 ‘실패’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이야말로 노력해주었으면 한다”면서 “재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결과적으로 창업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싶다”고 전했다. 요컨대 “‘실패해도 괜찮다면 도전해보자’고 생각하는 사람을 늘림으로써 스타트업 창업 및 경제 활성화로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NHK에 따르면 “최근 2년간 40명이 도쿄도의 관련 프로그램을 수강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10여 명이 이미 재창업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쿄도는 금년도에도 약 20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5월부터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 중이다.
한편, 시미즈 씨는 도산한 경험을 살려 지원활동도 펼치고 있다. 3년 전에는 도산한 전직 경영자들의 재도전을 응원하는 봉사단체도 설립했다. 이와 관련 시미즈 씨는 “경영자들은 대부분 갑옷을 입고 있다. 가령 ‘사장의 갑옷’, ‘강한 남편의 갑옷’ 같은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하나씩 갑옷을 벗고 마지막에는 눈물을 쏟는다”고 한다. 그는 “다시 시작하려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단체는 도산을 경험한 경영자들이 새로운 비즈니스 플랜을 논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실패 요인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활발한 의견이 오간다. 시미즈 씨는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는 것”이라며 “실패에 관용적인 일본 사회가 되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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