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범인 유전자 찾아낸 후 다시 5년여 끈질긴 추적 수사로 이정학·이승만 체포
사건이 벌어진 것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 무렵이다. 복면을 한 2인조 강도가 대전 서구 둔산동 국민은행 둔산지점 지하주차장에서 현금을 옮기던 은행 직원 김 아무개 현금출납 과장에게 실탄 2발을 가슴과 다리에 쏜 뒤 3억 원이 든 가방을 빼앗아 도주했다. 당시 김 과장은 청원경찰 등 2명과 함께 은행 영업자금 6억 원을 2개의 가방에 나눠 수송하고 있었다. 2인조 강도는 그랜저XG 승용차를 타고 도주했고 김 과장은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30여 분 뒤 숨졌다. 강도들이 가져 간 돈 가방은 리모컨을 작동하면 강한 전류가 흐르는 장치가 설치돼 있었지만 사건 당시에는 작동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인조 강도가 사용한 승용차는 ‘경기○○ 5427’ 그랜저XG 차량으로 2001년 12월 1일 경기도 수원 영통에서 시동이 걸린 채 주차돼 있다가 도난당한 차량이었다. 경찰은 바로 대전 둔산경찰서 삼천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주요 예상 도주로의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해당 승용차를 수배하는 등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사건이 발생한 은행 건물 지하 주차장에는 CC(폐쇄회로)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그리고 범죄에 사용된 그랜저XG 승용차는 사건 현장에서 300m가량 떨어진 빌딩 주차장에서 발견됐지만 지문 등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곧 범인들이 사용한 총기가 탈취 당한 경찰 총기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앞서 2001년 10월 대전 송촌동 주택가 골목길에서 순찰 중이던 노 아무개 경사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뒤 실탄 4발과 공포탄 1발이 장전된 3.8구경 권총 1정을 도난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대전 국민은행 권총강도사건 현장에서 수거된 탄두 1발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정밀 감식 결과 탈취당한 경찰 총기와 동일한 3.8구경 권총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용의자 2명의 몽타주 및 인상착의, 범죄 이용차량과 현금수송 가방 사진 등이 담긴 수배전단 10만여 장을 제작해 대전 주요 지역에서 배포했다. 2000만 원의 현상금까지 걸었다.
사건 발생 8개월여 만인 2002년 8월 ‘대전 국민은행 권총강도사건 수사본부’는 20대 초반인 송 아무개 씨와 김 아무개 씨 등 일당을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영장실질심사에서 ‘범죄증거 및 소명부족’이라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고 용의자들은 모두 풀려났다. 이들은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당시 “경찰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들은 진범과는 전혀 무관한 이들이었다.
이후 수사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면서 대전 국민은행 권총강도사건은 미제사건이 되고 말았다. 사건 발생 이후 1년 동안 목격자와 전과자 등 5321명을 조사하고 차량 9276대와 통신기록 18만 2378건 등을 조사했으며 탐문 수사를 벌인 장소만 2만 9260곳이나 됐지만 허사였다.
다시 이 사건이 매스컴의 관심을 끈 것은 사건 발생 10년 뒤인 2011년이다. 대전경찰청이 장기 강력미제사건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수사하기로 결정하고 수사자료 취합에 나섰는데 대전에서 발생한 강력 미제사건 가운데 가장 화제가 됐던 대전 국민은행 권총강도사건이 첫 수사 대상이 됐다. 이를 위해 수사과 강력계에 외근반을 편성해 경위급을 팀장으로 4명의 형사들을 충원했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2014년 2월 대전경찰청은 지방청 미제사건전담수사팀을 중심으로 대전권 4개 경찰서 전담팀을 꾸려 미제사건 해결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이번에는 베테랑 형사 37명이 투입됐다. 당시 대전권 미제사건은 모두 7건으로 대표적인 사건은 역시 대전 국민은행 권총강도사건이었다. 게다가 공소시효가 2016년 12월까지로 2년 10개월 밖에 남지 않은 해결이 시급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경찰은 범인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2015년 9월에는 경찰청 차원에서 미제 살인사건 273건에 대해 전담팀을 설치하고 전면 재수사에 착수했다. 이는 2015년 7월 24일 국회를 통과한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일명 태완이법) 때문이다. 모든 미제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된 것은 아니고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범죄 중 아직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범죄’로 적용 대상이 한정됐는데 대전 국민은행 권총강도사건은 아직 공소시효가 1년 5개월가량 남아 있어서 공소시효 폐지 사건으로 분류됐다.
경찰청 차원의 미제 살인사건 전담팀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2017년 4월 김재원 당시 충남지방경찰청장의 ‘미제사건 원점 재검토 지시’에 따라 수사가 재개됐다. 그리고 비로소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2017년 10월이다. 대전 국민은행 권총강도사건 당시 범행에 쓰인 차량 내부에 있던 현장 유류물 가운데 마스크에서 유전자(DNA)가 검출된 것. 경찰은 바로 다른 현장 유류물인 손수건에 대한 재감식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해 동일한 유전자라는 회신을 받았다.
이제 유전자의 주인만 찾으면 범인 검거가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지문과 달리 유전자는 주인을 찾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그나마 꾸준히 발달해 온 경찰의 유전자 증폭기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건이 발생한 2001년에도 마스크를 감식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유전자 검출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실마리가 하나 더 나왔다. 여전히 ‘신원 불상 남성의 유전자’이기는 했지만, 권총강도사건 당시 범행에 쓰인 차량 내부에 있던 현장 유류물에서 이미 한 차례 발견된 유전자와 동일한 유전자였기 때문이다. 바로 2015년 충북 소재의 한 불법게임장 현장 유류물인 담배꽁초에서 검출된 유전자였다.
그나마 수사 범위가 좁혀졌지만 불법게임장에 드나든 것으로 보이는 종업원과 손님 등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이 무려 1만 5000명이나 됐다. 이후 5년 동안 수사를 진행한 경찰은 용의자 몽타주, 목격자 인상착의, 차량 절도 등의 범죄 경력 등을 대조해 대상자를 꾸준히 압축했고, 2022년 3월 비로소 충북 불법게임장 담배꽁초에서 검출된 유전자의 주인을 찾게 된다. 그렇게 유력한 대전 국민은행 권총강도사건의 용의자가 특정됐는데 바로 그가 이정학이다.
이후 경찰은 보강수사에 돌입했다. 2001년 사건 당시 목격자 진술을 바탕으로 작성됐던 몽타주와 이정학의 얼굴을 비교하고, 이정학의 행적과 주변인 조사 등을 거치며 이정학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꾸준히 수집했다. 이를 바탕으로 체포영장을 발부 받은 경찰은 8월 25일 비로소 경찰은 대전에서 이정학을 검거했고, 이정학의 진술을 통해 밝혀진 공범 이승만도 강원 정선에서 긴급체포했다. 사건 발생 7553일 만의 쾌거였다. 이정학과 이승만은 과거 수사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만큼 완벽한 범죄였다는 의미지만, 경찰은 아무리 완벽한 범죄도 결국엔 검거된다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전동선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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