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법인 제일의료재단은 지난 10월16일 10명의 이사 중 9명을 교체해 새로운 이사회를 출범시켰다. 이어 31일 법인명을 삼성제일의료재단에서 삼성 이름을 뺀 제일의료재단으로 바꿨다. 지난 1996년 5월 삼성의료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지 9년 만에 원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제일병원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사촌지간인 고 이동희 박사가 1963년 현재의 서울시 중구 묵정동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이다. 경남 의령군 정곡면 출신인 이 박사는 경기고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 서울부인암센터를 설립한 데 이어 1963년 현재의 제일병원을 설립했다. 이 박사의 부친인 이병각씨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형으로 삼강산업(현 롯데삼강)의 창업자이자 고미술품 수집가로도 유명했던 인물이다.
제일병원은 1996년 이 박사가 작고하면서 유언으로 삼성의료원에 기증되어 삼성제일병원으로 운영되어 왔다.
제일병원이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한 배경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 박사의 미망인 오유덕씨를 비롯한 유족들이 재산권 행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번 이사회 구성원 교체로 이 박사의 아들인 이재곤씨가 이사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전까지 건축관련 사업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까지는 1996년부터 송자 대교회장이 이사장을 맡아 왔다.
이번에 이사로 선임된 박종택 병원장은 이건희 회장이 제일병원의 분리를 제안해 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동희 박사 유족들의 요구와, 삼성의료원 계열 병원들과 달리 영세성을 면치 못하는 제일병원을 삼성그룹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의도가 맞물린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 때문에 제일병원이 재단명칭을 변경했지만 병원명에서도 삼성이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삼성의료원으로부터 분리됐지만 이는 상징적인 것에 그칠 뿐 재산권에 별다른 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제일병원은 이전부터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독립적 운영과 달리 의사들이 삼성의료원 소속으로 되어 인사권을 가지지 못했던 것도 분리에 대한 동기로 꼽히고 있다.
▲ 이건희 회장(왼쪽), 고 이동희 박사 | ||
제일병원이 터를 잡고 있는 묵정동은 남산의 아랫자락이라 그간 고도제한에 걸려 5층이 넘는 건물을 짓지 못했다. 서울시 중구청은 고도제한을 완화한 도시계획 심의가 지난 9월부터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고도제한을 완화해주는 대신 일대의 교통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일부 토지를 도로용으로 기부하는 조건이라고 구청 관계자는 전했다. 현재 제일병원의 외래진료동과 입원실 건물, 주차장 등 3천2백 평은 도시정비사업인 ‘특별계획구역2’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 제일병원은 2필지 1백 평을 추가 매입해 필요한 부지를 확보했다. 다만 아직 사들이지 못한 세 필지를 매입하는 것이 걸림돌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간 병원이 진행하던 확장 계획이 가시권에 들어가자 유족들이 더 늦기 전에 병원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냐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제일병원 건물 증축은 이동희 박사가 생전에 추진해왔던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동희 박사가 직접 설계도까지 마련했으나 사망으로 인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한 제일병원은 9년의 세월을 넘어 아들의 손에 의해 이 박사의 뜻을 이어갈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우종국 기자 woobea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