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랭이논에 유채꽃이 노란 물감을 슬쩍 풀어놓았다. |
어떤 멋진 풍경을 볼 적이면, 감탄의 마음보다 아릿함이 먼저 배어나올 때가 있다. 인간이 만든 것일 경우가 특히 그렇다. 불가사의한 피라미드와 만리장성 등을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아팠을까.
멀리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남해군의 다랭이마을도 마찬가지다. 남해군은 섬 아닌 섬이다. 생긴 모양이 꼭 나비를 닮은 남해군은 창선면이 삼천포대교, 설천면이 남해대교로 뭍과 연결되면서 찾아가는 데 더 이상 배가 필요 없어졌다.
▲ 마을에 거주하는 노인이 나물을 다듬고 있다. |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에 등재된 필리핀 바나우에 논의 규모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이곳의 논 또한 무려 100층 가까이 쌓아올린 논배미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무엇하나 심을 것 없는 척박한 땅을 일구어 가천마을 사람들은 논을 만들었다. 땀을 쏟은 만큼 다랭이논이 바다와 산으로 향하면서 전체 면적을 넓혀갔다. 마치 섬의 나이테 같기도 하고, 물고기 비늘 같기도 한 논배미에는 요즘 황토의 맨살 위로 대파가 먼저 푸릇하니 솟았고, 유채도 노란 물감을 살짝 풀었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풍경이 결코 감상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히 태풍의 계절이 오면 마을 사람들은 초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몇 년 전 태풍 매미가 왔을 때는 논이 구들장처럼 다 날아가는 줄 알았다. 결국 그 해 농사는 전부 포기했더랬다.
다랭이마을에는 그 아픈 노동의 흔적인 논외에도 볼거리가 더 있다. 마을 곳곳에 그려놓은 벽화를 찾아다니며 골목을 누비다보면 밥무덤과 암수바위를 만난다. 밥무덤은 마을 중앙과 동, 서 세 군데에 있다. 돌을 쌓아서 굴뚝처럼 생긴 작은 집을 만들었다. 음력으로 10월 15일 저녁 8시가 되면 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사용했던 밥을 한지에 싸서 무덤 안에 넣어 둔다. 제삿밥을 정식으로 얻어먹지 못 하고 떠도는 혼령들을 위한 것이다. 이 혼령들을 위로하며 마을 사람들은 풍어와 안녕을 기원한다. 암수바위는 해안 쪽으로 마을 맨 아래 서쪽에 있다. 바위 두 개가 있는데, 남녀의 성기처럼 생겼다. 불임부부가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점지해 준다고 한다.
가천 다랭이마을과 함께 찾아봐야 할 곳이 있다. 높이 681m의 야트막한 금산이다. 상주면에 자리한 이 산은 보광산으로 불리다가 비단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금산(錦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암괴석으로 덮인 38개의 아름다운 절경을 간직한 산으로도 유명하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보다 쉽고 편리하게 풍경을 훔쳐오려고 한다. 금산은 왕복산행이 3시간이면 충분한 산이다. 쌍홍문 아래 금산의 들목이 있다. 그렇지만 등산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 보리암 바로 아래 제2매표소로 나든다. 몇 년 간 길을 계속 닦더니 이제 완전히 포장이 끝났다. 안타깝다. 시간이 절약되고 힘도 덜 들겠지만 산은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를 입었고, 또한 늘어난 방문객으로 인해 예전의 호젓함을 잃었다.
▲ 안개에 휩싸인 남해 금산 보리암의 모습. |
보리암은 정상의 봉수대와 상사암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금산 최고의 조망대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다도해의 풍광이 그야말로 시원스레 펼쳐진다. 발밑으로 초승달처럼 생긴 상주해수욕장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호도, 애도, 떼섬, 밤섬, 목섬 등이 멀리서부터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점점이 떠 있다. 오른쪽으로는 상여도와 소치도 등이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새벽을 기해 산에 오른다면 다도해와 어우러진, 기억에 각인될 만한 해오름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산행으로 그 같은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 시시때때로 운무와 해무가 금산과 그 아래를 휘감으며 좀처럼 맑고 투명한 시야를 선사하지 않는 것이다. 산에 애정을 가지고 그 속의 돌들과 사랑을 나누며 여러 차례 오르기를 거듭한다면 금산은 언젠가 뜻밖의 선물처럼 눈앞에 깨끗한 다도해를 펼쳐 보일 것이다.
남해군의 봄을 느끼는 또 다른 방법은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것이다. 미조항에서부터 물건리까지 10여㎞가량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봄 햇살을 만끽하며 초전-항도-가인포-대지포-은점 등의 작은 포구를 지나쳐 달리다보면 해안도로의 마지막 지점인 물건리를 만난다. 방조어부림이 있는 마을이다. 태풍과 염해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고기를 모이게 하는 숲이 방조어부림이다. 길이 1.5㎞, 너비 30m의 반달형으로 팽나무와 상수리나무, 이팝나무 등이 심어져 있는 물건리 숲은 조성된 지 300년이 넘었다. 숲의 나무들에도 어느새 파릇한 잎사귀들이 돋아나 싱그러움을 전한다.
▲ 남해독일마을. 1960년대 독일에 외화벌이를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정착한 마을이다. |
독일마을 뒤편 길로 약 10분쯤 달리면 나비생태공원이 있다. 계절에 관계없이 나비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살아있는 나비를 볼 수 있는 온실과 나비의 생애관찰이 가능한 체험학습장과 전시실, 다양한 곤충을 만나볼 수 있는 표본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나비생태공원 뒤편에는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자연휴양림이 있고, 바로 앞 내산저수지가에는 무인으로 운영되는 바람흔적미술관이 있다.
물건리에서 해안도로는 끝나지만, 가던 길을 내쳐 달리면 곧 지족마을에 닿는다. 지족마을 앞바다에는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죽방렴이 바다 곳곳에 있다. 참나무 말뚝을 V자로 박고 대나무로 발을 엮어 물고기가 들어오면 잡는 전통어구다. 죽방렴을 이용해 잡은 물고기는 상처가 없어서 값을 더 받는다.
김동옥 여행작가 tour@ilyo.co.kr
▲길잡이: 대전-통영간 고속국도 진주JC→남해고속국도 사천IC→3번 국도→창선-삼천포대교→남해군
▲잠자리: 남해군만큼 숙박시설이 잘 갖춰진 곳도 드물다. 어딜 가든 볼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인데, 각 면소재지마다 리조트, 펜션, 모텔 등이 많다. 삼동면 물건리의 방조어부림이 내려다 보이는 남송가족관광호텔(055-867-4710), 영지리 해안도로에 있는 사우스타임모텔(055-867-3688)과 실크모텔(055-867-2575), 항구가 아름다운 미조면 송정리의 프랑스리조트(055-867-2253) 등을 추천할 만하다.
▲먹을거리: 남해군의 맛을 바다에서 찾는 것은 당연하다. 봄은 멸치가 제철을 맞는 때다. 말려서 국물 우릴 때 쓰거나, 고추장을 찍어 먹는 게 고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회로도 먹는다. 멸치의 뼈를 발라낸 후 초장을 듬뿍 뿌린 채소와 함께 버무려 먹는 맛이 무척 고소하다. 미조항 남미횟집(055-867-6051)이 유명하다. 제대로 갖춰진 밥상으로는 남해군청 앞 미담(http://www.midamm.co.kr 055-864-2277)을 추천한다. 40년 전통의 한정식집으로 다양한 육류와 해산물을 고루 맛볼 수 있다.
▲문의: 남해군 문화관광포털(http://www.tournamhae.net) 문화관광과 055-860-3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