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 회장. | ||
재계에선 이건희 삼성 회장의 귀국 시기를 2월 말~3월 초 정도로 보고 있다. 이 회장은 IOC위원 자격으로 2월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엔 귀국할 가능성이 없다는 게 삼성측 인사들의 답변이다. 2월 토리노 올림픽 이후 장기외유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이 회장이 귀국해야 에버랜드 사건 수사도 종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회장 귀국설이 힘을 받는다.
검찰이 연초 정기인사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검사장급에서 일선 차·부장급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 위해선 에버랜드 건이나 황우석 교수 건, 윤상림 사건 같은 굵직한 수사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돼야 가능할 것이다. 큰 사건 진행중에 수사담당자를 바꿀 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이 회장으로 하여금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할 법도 하다.
오랜 외유 끝에 국내에 돌아올 이 회장 앞에 놓인 최대 고민거리는 역시 검찰 소환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여러 난제들이 쌓여있다. 구조조정본부(구조본) 내의 인사 관련 잡음이나 법무라인의 균열음, 그리고 후계자인 이재용 상무의 거취 문제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조본의 핵심 임원들은 모두 이번 연초 인사에서 유임됐다. 재계 인사들의 예상과 다른 결과였다. 타 재벌그룹 정보팀은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삼성 구조본 인사와 관련해 요직에 있는 A씨와 B씨의 퇴진 가능성을 자사 수뇌부에 보고한 바 있다. 예상 후임인사에 대한 하마평도 재계인사들의 주된 이야깃거리였다. 지난해 삼성 관련 악재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책임론이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재계의 한결같은 예상과 달리 A씨와 B씨는 이번 인사에서 유임됐다. 이 회장이 국내를 비운 상태에서 물갈이보다는 현 상태 유지가 나을 것이란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는 곧 이 회장의 귀국 직후 벌어질 대규모 추가 인사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 회장이 귀국한 뒤 검찰의 에버랜드 수사가 일단락될 경우, 이 회장이 구조본에 인사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삼성 주변에선 구조본 인사들의 거취에 대한 말들이 많아지고 있다. A씨는 사의표명까지 했다는 소문도 전해진다. “안주머니에 사표 넣고 다니는 사람이 일 제대로 할 수 있겠나”란 얘기가 있다. 삼성 구조본의 결속력 저하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다.
앞서 거론한 구조본 핵심인력들 외에 법무팀 역시 지난해 그룹 내에서 비난여론의 화살을 맞아야했다. 이 회장 아들 이재용 상무에 대한 에버랜드 주식 편법증여 건에 대한 법원의 유죄판결로 이종왕 법무실장을 필두로 한 법무팀 위상이 위축됐다. 지난해 삼성 고위인사가 이종왕 실장보다 선배인 법조인을 접촉해 이 실장 경질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에버랜드 건과 관련해 검찰 주변에서 이건희-이재용 부자에 대한 소환 가능성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지만 삼성 법무팀은 이에 대한 묘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최근 재경부는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국회 의결을 거쳐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금융지주회사가 된 기업이 1년 내에 금융지주회사가 된 사유를 해소하지 못하면 금융감독 당국으로부터 주식처분 등 강제 시정조치를 받게 된다’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다. 현재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 등 비금융계열사→삼성카드→에버랜드’식의 순환출자구조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만약 에버랜드가 대량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을 처분하게 되면 삼성그룹 전체 지배구조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을 두고 삼성에 1년 유예 기간을 준다는 이른바 ‘삼성 봐주기’ 논란도 등장했지만 1년 안에 삼성이 에버랜드 소유 삼성생명 주식을 처분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배구조를 이어나갈 대안을 찾기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 이학수 부회장, 이종왕 법무실장, 이재용 상무(왼쪽부터) | ||
에버랜드가 소유한 삼성생명 지분 가치가 에버랜드 총 자산의 50%를 넘게 되면 에버랜드는 금융지주회사로 지정된다. 삼성은 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주식을 처음 살 때의 가격으로 회계처리(원가법 적용)를 해서 금융지주회사 선정을 피하고 있다. 만약 현재 삼성생명 지분의 가치로 회계처리하게 되면(지분법 적용) 에버랜드 자산의 50%가 넘어 금융지주회사법이 적용된다. 재경부의 이번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은 에버랜드 회계처리방식을 지분법으로 보기 위한 전주곡이란 관측도 나온다. 현재 삼성 내부에선 대응논리 개발을 통해 금융당국과 정치권에 대한 전방위적 로비를 계획하고 있지만 그럴듯한 대안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믿을 만한 외부 조력자가 사라진 점도 삼성 법무팀의 고민거리를 증가시켜주고 있다. 그동안 에버랜드 건 변호인을 맡아온 김종훈 변호사가 지난해 말 이용훈 대법원장의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점은 삼성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대북송금 특검보를 지낸 지명도와 에버랜드 사건 진행 노하우를 동시에 지닌 김종훈 변호사의 이직으로 삼성은 에버랜드 건에 대한 큰 방패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새해 전무 승진이 확실시 여겨졌던 이재용 상무가 승진인사에서 제외된 점도 삼성의 큰 고민거리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재계2위인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 아들 정의선 사장이 올해 부회장 승진설이 나도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상무 승진이 무산된 것은 검찰의 삼성 수사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난해 말 에버랜드 관련 회계법인 압수수색에 이어 최근엔 이 상무가 주도했던 사업 부실화에 따른 계열사 부당 지원 과정에 대한 검찰의 내사 소문도 들려온다. 이 상무가 전무로 승진할 경우 오히려 부작용만 낳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삼성이 무리해서 이 상무를 조기 승진시킬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상무는 현대차 정의선 사장과는 달리 이미 후계승계를 위한 지분 확보를 마친 상태라는 것. 그러나 이 회장의 건강악화설과 맞물려 이 상무 역시 후계과정에 속도를 내야 할 입장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구조본 인사문제와 에버랜드 건을 둘러싼 법무라인의 대처과정 등은 결국 이 상무의 후계구도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상무의 ‘대관식’을 위해 일부 중량급 인사의 퇴진도 필요할 것이며 에버랜드 건은 이 상무의 후계 지분 확보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회장 귀국이 임박한 시점에서 삼성이 직면한 난제들이 얼마나 잘 처리되느냐에 따라 이 상무 앞날의 빛깔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