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50억 무죄 등 ‘법은 있는 자의 편’ 무력감…현실서 불가능한 ‘사적 복수’ 보며 대리만족
미국 유력 경제지 포브스는 3월 15일(현지시각) “만약 ‘더 글로리’를 본 후 복수극에 대한 갈증이 남아 있다면, 이 K 드라마들을 챙겨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렇게 권했다. 포브스가 추천한 드라마는 현재 방송 중인 SBS ‘모범택시2’를 비롯해 배우 송중기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빈센조’와 ‘재벌집 막내아들’, 배우 박서준이 출연한 ‘이태원 클라쓰’ 등이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악행을 저지른 이들에 대해서 주인공들이 사적 복수를 가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권력을 통하지 않은 복수는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하지만 이는 ‘공자님 말씀’일 뿐이다. 대중은 이런 사적 복수를 지켜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낀다.
#‘더 글로리’ 누리고 ‘모범택시’ 탄다
배우 송혜교가 주연을 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는 공개된 지 사흘 만에 글로벌 흥행 순위 1위(플릭스패트롤 기준)에 올랐다. 2022년 말 공개된 시즌1은 비영어권 1위였으나, 이번에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전 세계 시청자들과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무려 35개국에서 1위를 기록했고, 태국에서는 학교 폭력을 저지른 유명 연예인들에 대한 폭로가 나와 그들이 직접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더 글로리’에서 복수의 대상은 학교폭력(학폭) 가해자들이다. 그리고 학폭 피해를 입은 주인공 문동은(송혜교 분)이 복수의 중심에 섰다. 물론 그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설계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강현남(염혜란 분)과 목숨을 살려 준 범죄자에게 살해당한 아버지를 둔 의사 주여정(이도현 분)이 있다. 이외에도 학폭 피해를 입은 어린 동은을 보호하려 했던 간호교사, 동은의 옛 직장동료들이 합심한다. 결국 ‘피해자의 연대’를 통해 가해자들을 심판하게 된다.
이는 16%가 넘는 시청률을 구가 중인 ‘모범택시2’에도 적용된다. ‘모범택시’는 법으로 처단하지 못한 악인들을 엄벌하는 ‘다크 히어로’들이 주인공이다. 특수부대 장교 출신으로 압도적인 물리력을 활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김도기(이제훈 분)는 어머니를 죽인 살인마에 대한 복수심에서 사적 복수를 시작했다.
무지개운수의 대표인 장성철(김의성 분) 역시 부모가 사회적 약자만을 타깃으로 삼던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한 뒤 범죄 피해자 재단을 통해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섰고, 무지개운수에서 ‘화이트 해커’로서 지략을 담당하는 안고은(표예진 분)은 그의 언니가 불법 동영상의 피해를 입은 뒤 무지개 운수에 합류하게 됐다.
시즌2에서 ‘모범택시’는 구직으로 청년들을 해외로 유인해 감금한 뒤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당, 시골 노인들을 대상으로 개인 정보를 불법 취득해 빚더미에 앉게 하는 일당, 사이비 종교 단체 등을 차례로 응징한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실제 발생했던 사건들을 기반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더욱 큰 쾌감을 준다.
포브스는 ‘더 글로리’와 ‘모범택시’에 대해 각각 “시청자들이 ‘복수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훈이 연기하는 택시기사는 가해자들을 대상으로 복수하고, 범죄자들이 마땅히 처벌받도록 피해자들을 돕는다”면서 “가장 좋은 복수는 (직접 복수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K 복수극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얻는 것”이라고 평했다.
#왜 사적 복수에 열광할까
사적 복수는 어떤 방식이어도 용납될 수 없다. 또 다른 폭력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위해 폭력을 쓰는 자 역시 선보다 악의 영역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드라마들은 ‘악을 선으로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식이다.
이는 2021년 방송됐던 ‘빈센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탈리아 마피아의 변호사로 일하며 그들의 악행을 덮는 일을 하던 빈센조(송중기 분)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 방화 등 비윤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마지막 회에서도 사회악을 상대로 통쾌한 복수를 선사한다. 이는 학폭 가해자들이 끔찍한 결말을 맞게 되는 ‘더 글로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저변에는 ‘힘을 가진 악인은 법망도 피해간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더 글로리’에서 학폭 피해자 동은은 교사와 경찰에게 피해를 신고했다. 하지만 뒷돈을 받는 교사나 경찰은 가해자의 편이었다. 또 다른 가해자 전재준(박성훈 분)은 항상 변호사를 대동한다. 그들이 가진 돈으로 능력 있는 변호사를 고용해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간다. ‘빈센조’의 악인 역시 재벌이다. 당연히 그들은 막강한 보호막을 펼치는 법무팀과 그들의 손을 잡고 악의 카르텔을 구축한 권력자 뒤에 숨는다.
이렇듯 대중이 공분을 일으키는 드라마 속 설정은 현실과도 겹친다. 이를 보며 대중은 ‘법은 있는 자의 편’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폭 가해 사실이 드러나며 낙마했다. 이 과정에서 정 변호사가 검사 시절 그의 법 지식을 활용해 아들의 학폭 가해를 무마시키려 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돼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이외에도 곽상도 전 의원의 아들이 퇴직금으로 무려 50억 원을 받은 사건과 관련, 곽상도 전 의원이 무죄 판결을 받는 과정을 지켜보며 대중은 엄청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현실을 목도하며 무력함을 느낀 대중이 사적 복수라는 행위를 통해 공권력으로 다스릴 수 없는 이들을 단죄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 만족을 얻는 셈이다.
‘더 글로리 파트2’ 공개에 앞서 3월 8일 진행된 GV(관객과의 대화)에서 김은숙 작가가 “동은처럼 돈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거나 그런 가정환경이 없는 피해자들을 응원해보고 싶었다”면서 “현실은 너무 반대니까, 동은이의 복수가 성공하는 쪽으로 많이 가려고 했다”고 말한 이유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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