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액션스타에서 할리우드 원톱 주연으로…“황금기 지났다는 말 믿지 말라” 60세에 오스카 수상
#발레리나 꿈꾼 미스 말레이시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제95회 아카데미 최고의 영화로 기록됐다.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 각본상, 여우주연상(양자경), 남우조연상(키 호이 콴), 여우조연상(제이미 리 커티스) 등 7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이 영화 앞에 쌓여 있는 오스카 트로피들은 감독의 역량(감독상)과 좋은 각본(각본상), 뛰어난 편집(편집상)이 좋은 배우들(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을 만나 최고의 작품(작품상)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중심은 양자경이다. 현지 매체들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그려낸 멀티버스 세계에 결국 양자경이 평생 동안 쌓아 온 필모그래피가 모두 담겨 있다고 평가할 정도다.
오랜 기간 한국 극장가에서 홍콩 영화가 큰 사랑을 받았던 터라 양자경은 한국 관객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배우다. 사실 홍콩인이 아닌 말레이시아인으로 스무 살이던 1983년 미스 말레이시아로 선발되며 연예계에 입문했다. 말레이시아의 부유한 화교 집안에서 태어난 양자경은 어린 시절 발레를 배워 영국 왕립무용학교를 다녔지만 척추 부상으로 발레리나의 꿈을 접고 전공을 연기로 바꾸게 됐다.
미스 말레이시아가 된 뒤 성룡과 함께 CF를 찍으며 홍콩 연예계로 진출해 골든트리오 멤버 성룡, 홍금보, 원표를 비롯해 적위 등과 인연을 맺으면서 원표와 적위 등에게 무술을 배웠다. 데뷔작도 홍금보가 감독과 주연을 모두 소화한 ‘범보’(1984)였는데 여기에선 조연이었다.
양자경을 스타덤에 올려준 작품은 1985년 개봉한 ‘예스 마담’으로 큰 인기를 얻어 시리즈로 제작돼 국내에서도 팬들이 많다. 당시 양자경은 대부분의 액션 연기를 본인이 직접 소화하며 액션 배우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렇지만 양자경은 1987년 결혼하며 연예계에서 은퇴했다. 양자경의 1984년 데뷔작 ‘범보’가 국내에선 1989년에 개봉했는데 당시 국내에선 이 영화를 은퇴한 양자경의 마지막 영화라고 홍보했었다. 실제로는 데뷔작이며 조연이었음에도 마치 양자경 주연 영화로 홍보가 됐는데 그만큼 양자경이 1980년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누렸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양자경은 1992년 이혼한 뒤 연예계로 복귀해 다시 다양한 영화에 출연한다. 복귀작 역시 성룡의 영화 ‘폴리스 스토리 3’로 중국 공안으로 변신한 양자경은 단 번에 다시 스타덤에 오른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홍콩 영화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국내에서도 인기가 시들해진다.
#‘본드걸’로 할리우드 진출했지만…
양자경이라는 이름이 다시 국내에서 화제가 된 것은 1997년으로 그가 007 시리즈 ‘007 네버다이’에서 본드걸로 출연하면서다. 이 영화를 계기로 양자경은 홍콩 영화계에서 할리우드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다. 이후 ‘와호장룡’(2000년), ‘게이샤의 추억’(2005년), ‘미이라 3: 황제의 무덤’(2008년)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도 각광받는 배우로 거듭난다.
2017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로 마블와 인연을 맺어 2021년에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 출연하며 마블의 일원이 됐고, ‘쿵푸팬더2’, ‘미니언즈2’ 등 인기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 연기를 맡기도 했다.
2010년에는 영화 ‘검우강호’에 출연했는데 이 작품은 제67회 베니스영화제 비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국내에선 이 영화가 폐막작으로 선정될 가능성까지 제기되며 큰 관심을 받았는데 바로 양자경과 함께 주연을 맡은 배우가 정우성이기 때문이다. 2015년에는 영국 TV 시리즈 ‘스트라이크 백 시즌5’에 출연했는데 여기서 양자경이 맡은 역할은 북한의 특수요원으로 한국어 대사도 종종 나오는데 발음은 기대 이하였다.
오랜 기간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건재함을 과시해온 양자경이지만 액션 연기가 가능한 아시아인 조연급 캐릭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출연 작품과 연기에 대한 평도 엇갈리곤 했던 게 사실이다. 할리우드의 유리천장은 그만큼 탄탄했다.
#유리천장에 균열 낸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이런 분위기를 뒤바꾼 작품은 2018년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으로 남자 주인공 닉 영(헨리 골딩 분)의 어머니 엘레노어 영 역할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는 레이첼 추(콘스탄스 우 분)가 남자친구 닉 영이 싱가포르 최고 부자 집안의 아들임을 모르고 싱가포르를 방문해 엄청난 시월드를 경험하는 내용으로 바로 양자경이 그 엄청난 집안의 안주인인 예비 시어머니 역할이었다.
그리고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통해 다시 한 번 할리우드 영화의 원톱 주인공 역할을 소화한 양자경은 비로소 오스카 트로피까지 품에 안았다. 수상소감에서 양자경은 “감사하다. 어린 아이들에게 이것이 희망의 불꽃이 되길 바란다. 가능성이 되길 바란다. 큰 꿈을 꾸고 꿈은 현실이 된다는 걸 보여주길 바란다”면서 “여성 여러분! 황금기가 지났다는 말을 절대 믿지 말길 바란다. 전세계 어머니들에게 바친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바로 영웅이기 때문”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기본적으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소화한 캐릭터 에블린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으로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다 세무조사의 위기에 직면한 에블린은 연로한 아버지의 딸이자 갑자기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의 아내, 그리고 삐딱한 딸의 어머니다. 황금기를 지나 위태로운 현실을 살아가던 에블린이 멀티버스 세계를 경험하며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그렇지만 이 수상소감은 배우 양자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홍콩 영화계를 거쳐 할리우드로 진출한 양자경은 할리우드의 유리천장 안에서 할리우드가 원하는 아시아인 캐릭터를 소화하는 그저 그런 배우가 될 수도 있었다. 배우로서의 황금기가 지난, 이제 60대로 접어든 노년의 배우가 돼 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통해 배우로서 건재함을 분명히 드러냈고, 아시아계 영화인들이 모여 훌륭한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역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비슷한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할리우드 영화다. 양자경을 비롯한 아시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았으며 중국계 미국인 감독 대니얼 콴이 공동 연출한 대니얼 쉐이너트와 감독상과 각본상을 공동 수상했다.
김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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