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 상대 피싱과 마약 결합 ‘윗선’ 중국 점조직 추적 쉽잖아…현행 마약류관리법상 엄벌도 어려워
#'뛰는 놈 위 나는 놈' 중국에…
"배후 세력을 끝까지 추적 검거해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불퇴전(不退轉)의 각오로 마약과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4월 12일 전국 시도경찰청장 화상회의를 열고 이같이 밝혔다. 마약 조직 청산에 '팀 전체 특진'까지 내걸었다. 4월 초 대치동 학원가에서 필로폰 섞인 음료가 배포된 사건의 충격파다. 음료를 제조한 길 아무개 씨(25), 중계기로 발신번호를 조작해 '자녀가 마약을 투약했다'며 금품 협박 전화를 건 김 아무개 씨(39)는 구속됐고 학생들에게 음료를 나눠준 아르바이트생 4명도 검거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다만 이들은 각각 제조책, 통신책, 전달책일 뿐 '몸통'은 따로 있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그 정체는 아직 미궁이다. 당초 중국에 있는 한국 국적 A 씨를 총책으로 추정했으나 그 윗선이 추가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까진 중국 국적 남성 2명을 더 특정한 상태다. 경찰은 이들 3명의 체포영장을 발부 받았다. 국제 공조수사요청 및 여권 무효화 등을 통해 신병 확보에 나선 상태로 곧 결론을 내겠다는 다짐이다.
순탄치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크다. 피의자 대부분이 서로를 모르는 '점조직' 형태로 범행에 가담한 탓이다. 경찰이 애초 A 씨를 총책으로 추정한 배경은 제조책인 길 씨의 진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사를 이어가며 A 씨를 지휘하는 세력이 또 발견됐다. 점조직 특성상 이 같은 '윗선의 윗선'은 앞으로도 더 나올 수 있다. 게다가 중국 공안이 협조에 적극적일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가 더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 역시 경찰의 무거운 숙제다. 길 씨는 총 100병의 마약음료를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이 가운데 학생들한테는 총 18병을 나눠줬다. 2명의 아르바이트생이 1병씩 총 2병을 마셨다. 경찰이 미개봉 상태로 압수한 음료는 36병이다.
나머지 44병의 행방이 묘연하다. 길 씨는 "중국 조직원 지령에 따라 폐기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신뢰성은 미지수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전부 진술로만 확인한 사항"이라며 "계속 수사 중"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학생들에 나눠진 18병 가운데 음용이 확인된 수도 7건에 불과하다. 전달은 됐으나 버려진 게 3병. 그 외 8병은 음용 여부를 파악하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중간고사 기간이라 수사 협조 등을 성가시게 받아들여 신고에 망설이는 학생·부모가 많다고 전해졌다.
마약인 줄 알고 마신 채 사실을 숨긴 사례는 없을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단 해당 사건과 별개로 다른 장소에서 마약이 퍼졌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윗선 추적 상황과 마약 거래 경로, 국제 공조 등에 진전이 있으면 중간 브리핑을 통해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며 "현재는 압수한 물품을 분석해 전화가 어디서 걸려왔으며 IP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총체적으로 분석 중"이라고 말했다.
#수사당국 명운 걸었다
마약청정국 위상이 깨진 지 오래지만 이번 사건의 사회적 충격은 어느 때보다 크다. 일당은 자녀의 마약 사실을 빌미로 부모에 금품을 요구하는 등 협박을 시도했다. '보이스피싱'과 '마약' 두 유형의 범죄가 융합한 첫 사례다. 신속한 검거를 보여주지 못하면 범행 방식이 갈수록 교묘해질 것이란 우려가 따른다.
실제 마약을 거래해본 이들마저도 놀랐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과거 필로폰 투약 등으로 실형을 선고 받았던 이는 일요신문에 "마약을 '불특정 다수'에 배포한 발상 자체가 충격"이라며 "처음 투약하면 맛도 이상하지만 심장 박동이 빨라지거나 가려움증 등의 반응이 생길 수 있어 신고·적발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이스피싱을 주로 수사하는 지방청 소속 한 경찰 간부도 "과거에는 중계기를 별도 사무실이나 모텔 등에 달아 작업했으나, 요즘은 수시로 이동하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에도 설치해 추적이 까다로워진 건 사실"이라면서 "그럼에도 공범 가운데 한 명만 붙잡혀도 진술 등으로 수사망이 좁혀질 수 있는데, '백주대낮 길 한복판 마약 배포'처럼 적발 가능성이 높은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사회를 향한 기만이자 테러"라고 지적했다.
수사 당국의 명운이 걸린 사안인 셈이다. 특히 길 씨와 함께 구속된 '통신책' 김 씨는 보이스피싱 전문 업자로 조사됐다. 경찰은 인천에서 김 씨를 검거하며 노트북 6대, USB 모뎀 96개, 휴대전화 유심 368개를 압수했다. 이 정도면 여느 보이스피싱 사건과 견줘도 조직 규모가 큰 편이라고 한다.
소탕에 성공해도 과제가 남는다. 엄벌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정작 적용할 혐의는 고민거리다. 마약 처벌의 근거가 되는 '마약류관리법'이 제조·유통에 관한 사항을 주로 담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처럼 마약의 정체를 숨기고 불특정 다수에 거저 준 경우에는 적용할 조항이 없다. 유흥주점 등에서 술에 몰래 마약을 타는 등의 유사 범죄들만 봐도, 성폭력이나 갈취 등 투약 후 저지른 범행에 관해서만 처벌한다.
형사법 전문인 전범진 변호사는 "현행 마약류관리법은 소지하거나 스스로 흡입하거나, 돈을 주고 거래하는 유통 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한계가 뚜렷하다"며 "이번 사건에서는 위험한 물질을 투약했다는 점에서 상해죄 정도가 적용 가능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법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도 부연했다.
한편 정부는 4월 11일 마약범죄 특별수사본부(특수본)를 출범시켰다. 검찰·경찰·관세청·교육부·식품의약품안전처·지방자치단체 등이 참여하는 범정부 기구로 투입 인원이 840명에 달한다. 신봉수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과 김갑식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형사국장이 공동 본부장을 맡았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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