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처조카로 북한 로열패밀리였던 이한영 씨. 이 씨는 옥중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갇혀있던 소설가 황석영 씨(아래)와 가깝게 지냈다. |
▲ 황석영 씨. |
양씨는 1993년 12월 서울구치소에 수감 당시 이한영 씨와 옥중에서 ‘친구’의 연을 맺게 됐다고 밝혔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아버지를 둔 양 씨에게 이 씨는 “아~ 홍원… 사과가 유명하지… 우리 친구할까?”라고 제안했고, 마침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특별한 연을 맺게 됐다는 것이다.
▲ 양하림 씨의 수기 일부. |
양 씨는 “이 씨는 모델 일을 하던 아내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했다고 했다. 기관원이 자신의 부모 역할을 대행해줘 무사히 결혼식을 치렀다는 얘기도 했다. 특히 이 씨는 사진을 품고 다닐 만큼 어린 딸에 대한 애정이 극진했다. 새끼손가락이 구부러져 있는 것이 자기네 집안 내력인데 자기 딸의 손가락도 그렇다며 기뻐할 때는 어린아이 같았다”고 기억했다.
양 씨는 이 씨로부터 들었다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전했다.
“망명 후 안기부 직원들은 이 씨에게 북한과 전혀 다른 남한의 실상에 대해 알려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억압받지 않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한 번은 천호동에 소재한 퇴폐이발소에 데려가더라는 것이다. 이 씨는 ‘자본주의 첫 경험’이라고 표현했는데 생전 처음 접하는 광경과 서비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극진한 ‘육탄 서비스’를 받은 후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에 차고 있던 고가의 롤렉스 시계를 아가씨에게 몰래 주고 나왔다는 것이다. 기관원들이 이미 서비스 비용을 지불했음에도 시계까지 주고 나왔다는 일화를 익살스런 동작과 이북 사투리를 섞어가며 털어놓는데 모두들 배꼽을 잡았다. 나중에 기관원들이 시계의 행방에 대해 물었고 결국 수사관들이 다시 그 업소를 찾아가 시계를 되돌려 받기 위해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는 얘기도 했다. ‘나중에 밖에서 만나면 장안동으로 안내하겠다’는 내 농담에 이 씨는 ‘그 약속 꼭 지켜야 한다’며 맞받아치기도 했다.”
양 씨는 또 “모스크바 유학생활을 한 이 씨는 노어(러시아어)를 잘했다. 특히 그는 순수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일례로 재소자들이 그를 놀리려고 ‘원래 신입들은 감방에서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가만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씨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방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에서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역할이 주어져 있는 것이 감방생활인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 씨의 행동이 얼마나 얄미웠겠나. 당시 구치소 내에서는 이 씨에 대한 소문이 암암리에 나돌았는데 본의 아니게 이 씨는 ‘북한 로열패밀리면 다냐’며 미움을 받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이 씨와의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몇 달 후 이 씨가 풀려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양 씨는 “KBS를 그만둔 이 씨는 가진 돈을 투자해 당시 활황세를 구가하던 주택조합건설 등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많은 돈을 벌었으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는 갖은 유혹에 휩쓸렸고 위·탈법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집행유예로 빠져 나왔으나 주택조합 사기사건으로 다시 구속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한 상태였다. 기각된다면 그는 꼼짝없이 징역을 살아야 될 처지였는데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그는 무척이나 초조해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 씨는 놀랍게도 몇 달 후 ‘무죄’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 과정에 대해 양 씨가 털어놓는 뒷얘기도 흥미롭다.
▲ 2009년 이한영 씨 12주기 추모식에 아내(맨 왼쪽) 등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
‘사회에서 꼭 한번 만나자’던 두 사람의 약속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1997년 2월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이 씨가 북한의 남파 간첩에 의해 살해됐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 양 씨는 “언제부턴가 이 씨는 은둔하던 종래의 생활에서 탈피해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성혜림의 서방탈출 소식이 보도된 이후 이 씨는 자신이 보고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심장부의 실체를 폭로했고 급기야 <대동강 로열패밀리>라는 책도 출간했다. 개인적으로는 내심 걱정되기도 했다. 내가 이 씨의 피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안양교도소에 있을 때였다. 김정일을 ‘스몰 김’이라 표현하며 여러 비밀 얘기를 털어놓던 이 씨가 김정일이 밀파한 자객에 의해 살해될 줄 누가 알았겠나. 한때나마 ‘친구’라는 이름으로 정을 나눴던 사이로서 무척 참담하고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 이한영 씨가 피살당한 집앞. 일요신문DB |
“‘황구라’라는 별명답게 황 선생은 넉살 좋은 입담을 풀어놨다. 북한과 인연이 있는 황 선생은 이한영과 의지하며 잘 지냈다. 사상 문제는 차치하고 황 선생은 아무나 접하기 힘든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었다. 독거수용 중인 황 선생의 불편을 덜어주고자 나는 식수 배식 등을 거들었다. 또 황 선생의 귀가 시릴 것 같아 방한모를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배식 때 황 선생이 이불을 덮고 곤히 잠을 자고 있기에 깨우지 않고 건너 뛴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내 밥은…? 난 뭘 먹어’라며 황당해하던 황 선생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황 선생은 나를 ‘양 군’이라 불렀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9방에 유명 영화제작사 사장인 L 씨가 외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양 씨는 “유명 작가와 영화제작자의 만남은 실로 큰 화제였다. 같은 사동에 있으니 이들은 수시로 접촉할 수 있었다. 특히 황 선생의 작품 중 월남전을 소재로 한 <무기의 그늘>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두 사람은 이 작품을 두고 ‘얼마 줘, 그럼 넘겨줄게’ 등의 사업성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작가에 대한 야망을 키우다가 반복된 수감생활로 그 꿈을 접어야 했던 나로서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고 귀띔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김정남과 권력 누리며 성장
▲ 성혜랑. |
1982년 스위스 제네바에 갔던 이 씨는 미국행을 꿈꾸다 대사관 직원들의 권유로 남한으로 망명했다. 1년여 동안 사회적응 훈련을 받은 그는 1984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면서 정체를 숨기고 제2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은둔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후 이 씨는 상상을 초월하는 북한 최고위층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북한정권의 실상을 고발했다.
결국 이 씨는 1997년 2월 15일 분당의 자택 엘리베이터 앞에서 피살당한다. 망명 후 김정일 일가의 치부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 씨의 부인은 이 씨에 대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친구들과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것을 너무도 좋아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 씨의 사망 책임을 둘러싸고 정부와 국정원은 책임을 회피했으나 유가족들은 국가에 막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북한의 실상을 알리려 노력한 이 씨의 뜻을 짓밟는 행위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 발생 11년 만인 2008년 대법원은 국가에 북한공작원에 의한 이 씨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9699만 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다만 재판부는 국정원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씨가 언론 등을 통해 스스로를 노출한 책임이 있다며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