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고보니 이런~6년 전, 5년 전 그때 그놈이네!
지난 6월 5일 경기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는 마약투약 혐의로 40대 이 아무개 씨를 검거한 뒤,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DNA 결과가 경기 서남부 일대에서 벌어진 연쇄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의 것과 일치한 사실을 밝혀냈다. 문제는 이 씨가 이미 두 차례나 경찰에 검거됐다 풀려난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 씨가 석방된 뒤에 9차례나 추가로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경찰의 부실수사 논란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미제사건 해결의 쾌거도 잠시 경찰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경기 서남부 발바리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봤다.
지난 2003년 2월 이른 아침, 인적이 드문 경기도 안산시 주택가에 한 낯선 남자가 현관문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폭력 및 주거침입 등의 전과 10범인 이 씨였다. 안산시에 거주하던 이 씨는 집집마다 현관 문고리를 돌려가며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은 집을 찾았다. 이 씨가 노린 것은 현관문이 잠겨 있는 않은 집에, 혼자 살고 있는 여성이었다.
집 주변을 10여 분 서성거리던 이 씨는 A 씨(여) 집의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현관문을 통해 침입한 이 씨는 A 씨의 얼굴을 가리고 무작정 폭행했다. 겁에 질린 A 씨는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이후 이 씨는 A 씨를 성폭행한 뒤 현금 30만 원을 갈취해 유유히 집을 빠져나왔다. 이것이 경기 서남부 일대에서 발생한 연쇄 성폭행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후 이 씨는 2011년 11월까지 경기 안산에서 15차례, 군포에서 5차례, 시흥과 안양에서 각각 1차례 등 경기 서남부 일대를 돌며 총 22회에 걸쳐 여성을 상대로 강도강간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놀라운 사실은 이 씨가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에 신설된 전담수사팀을 따돌리고 계속해서 범행을 이어 왔다는 점이다. 지난 2009년 전담수사팀을 통해 ‘경기 북부 발바리’를 검거했던 경기지방경찰청은 도내에서 이어지는 연쇄 성폭행 사건을 뿌리 뽑기 위해 2010년 강력계에 전담수사팀을 다시 꾸렸다. 이때 이 씨도 용의선상에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씨가 지난 8년 동안이나 성폭행 범죄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치밀함 때문이었다. 이 씨는 주로 인적이 드문 이른 아침 시간대에 범행을 저지르거나 낮 시간대에도 여성들만 있는 집만을 골라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20~30대 여성들로 이 중에는 10대 여학생과 자매가 함께 봉변을 당한 사실도 드러났다.
특히 이 씨는 주로 피해자의 얼굴을 이불 등으로 가리고 폭행해 피해자의 저항의지를 상실하게 만든 뒤 성폭행을 저질렀다. 범행 후에는 피해자를 협박해 신고의지마저 꺾었다. 특히 이 씨는 범행 후 피해자의 몸을 씻겨 증거 인멸을 시도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6월 15일 기자와 통화한 당시 전담수사팀 관계자는 “당시 피해자 중에 이 씨의 인상착의를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성범죄 특성상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 꺼려했다는 점도 연쇄 성범죄가 이어지는데 한몫했다. 2006년 ‘대전 발바리 사건’을 전담했던 수사관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이 정신적·육체적 충격이 크기 때문에 설령 용의자를 잡더라도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 확인을 거부하거나 피해 사실을 숨기기 십상이다”고 설명했다. 경기 서남부 발바리 사건의 경우 피해 신고를 한 여성만 22명인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성범죄 특성상 피해 신고를 꺼린 점을 감안할 때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구 미제로 남을 것 같았던 경기 서남부 발바리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지난 6월 5일 경기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는 경기도 안산시에서 마약투약 혐의로 이 씨를 긴급체포했다. 이후 경기 서남부 용의자와 범행수법이 유사함 점을 수상히 여긴 경찰은 곧바로 이 씨의 DNA를 채취해 긴급 감정을 의뢰했다.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들로부터 채취한 용의자의 체액을 통해 DNA를 보관하고 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 씨의 DNA와 일일이 대조했다. 조사결과 이 씨의 DNA는 서남부 일대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 DNA와 일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각 경찰서에서 벌어진 개별 사건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다. 피의자가 범행을 부인하고 있지만 추가 범행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침내 8년여를 끌어온 연쇄 성폭행 사건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씨가 이미 두 차례나 경찰에 검거됐다 풀려난 사실이 밝혀지며 경찰은 부실수사 논란에 휩싸였다. 이 씨는 지난 2006년 10월과 2007년 7월 각각 절도와 주거침입미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됐다. 당시 성범죄 경력이 없던 이 씨는 별다른 여죄에 대한 수사 없이 집행유예 2년과 5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문제는 풀려난 이 씨가 이후 9건의 강도강간 범죄를 추가로 저질렀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당시 경찰이 이 씨의 DNA조사만 했더라도 추가범죄를 막을 수 있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은 지난 2010년 7월에야 시행됐다. 그 전까지 DNA 채취를 위해서는 피의자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만일 법 개정 이전에 경찰이 이 씨의 DNA를 강제로 채취했다면 인권유린 논란이 불거질 소지도 있었다.
당시 전담팀을 꾸려 수사를 진행했던 담당 경찰관은 “그때는 법적으로 DNA 강제 채취를 할 수 없었다. 또 당시 이 씨는 성범죄 전과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뒤늦은 법 개정으로 경찰이 인권유린과 수사력 부재라는 기로에서 갈등하는 사이 경기 서남부 일대는 발바리 이 씨로 인해 공포에 떠는 나날을 보내야 했던 셈이다.
이훈철 기자 boazh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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