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2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국과 레바논의 경기에서 손흥민이 상대 수비수를 제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최강희 감독.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선수층 두터워져
한국 축구는 그간 한 번 정해진 포메이션은 그대로 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2002한일월드컵 때의 3-4-3 시스템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포백 디펜스 라인을 기준으로 다양한 전략이 이뤄져 축구 팬들의 눈길을 끌었다. 축구에서 포메이션은 결국 숫자놀음에 불과하다는 항간에서의 이야기도 있지만 4-3-3, 4-4-1-1, 4-2-3-1, 4-4-2 등 여러 가지 시스템을 오가면서 흥미를 자아낸 것은 분명했다. 두터운 선수 선발과 선택의 폭이 이렇듯 다양한 전략 구사를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우선 공격진부터 살펴보자.
최강희 감독이 K리그 전북 현대 사령탑 시절, 무한신뢰와 애정으로 제2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토종 공격수 이동국을 중심으로 이근호, 김신욱 등 울산 현대 공격 콤비를 적시적소에 투입해 시너지를 이끌었다.
김신욱은 비록 레바논과 홈 경기 때는 경고누적으로 인해 결장했지만 카타르 원정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내주고 위기를 맞이했을 때 197㎝(본인 입으로는 200㎝가 넘는다고 한다) 장신을 십분 활용한 제공권 장악 능력과 힘을 앞세워 흐름을 완전히 한국 쪽으로 돌려놓는 데 일조했다.
이근호는 주로 오른쪽 날개로 포진했다가 선수 교체와 전술 변화에 따라 왼쪽 측면으로 이동하기도 했고, 때로는 최전방에서 이동국 등과 투톱으로 호흡을 맞췄다. 레바논전에서는 미드필드 전 지역을 고루 활용하는 등 프리롤(Free-Role) 역할에도 충실했다. 비록 공식 프로필상의 신장은 177㎝에 불과하지만 과감한 헤딩 경합으로 벤치에 안정감을 줬다. 실제로 카타르 원정에서는 2골을 헤딩으로 뽑아내 만능 플레이어임을 입증했다. 레바논전에서는 천금같은 김보경의 선취골을 어시스트했다.
측면에서도 완벽함을 줬다. 무엇보다 김보경(세레소 오사카)의 재발견이 흥미로웠다. 작년 1월 카타르 아시안컵을 끝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한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자신의 후계자로 김보경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발재간이나 찬스 포착,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나다는 게 이유였다. 여기에 과감한 몸싸움과 중거리 슛 능력, 탁월한 세트피스 킥 감각까지 갖추고 있어 거의 만능에 가까웠다.
최 감독에 앞서 대표팀을 이끌었던 조광래 전 감독은 “발재간이나 잔기술은 오히려 지성이보다 낫다는 생각이다. 지성이도 그랬지만 어느 포지션을 맡겨놔도 자신의 임무와 역할을 풀어갈 줄 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김보경은 주로 왼쪽 날개로 위치했지만 레바논전에서는 오른쪽 측면으로 이동했고, 허리진 한복판에서도 임무를 수행했다. 디펜스에서도 적극성을 띠었다.
김보경이 처음부터 ‘완벽한’ 선수는 아니었다. ‘박지성의 후계자’라는 평가는 받아왔어도 일단 성장 가능성이 높은 유망주에 불과(?)했다. 그러나 꾸준한 땀과 노력이 현재의 김보경을 만들었다. 공식 훈련이 끝난 뒤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소홀히 하지 않아 선배, 코칭스태프의 격려를 받았다. 자신의 약점이었던 몸싸움 능력을 보강하기 위한 혹독한 단련이었다. 여기에 득점 능력까지 장착, 킬러 감각을 유감없이 뽐냈다. 사실 포지션에 따라 자신의 장기가 각기 다르다는 설명을 그는 덧붙였다. 전형적인 왼발잡이라는 자신의 특징을 십분 살리려는 측면도 있었다.
“왼쪽에서는 아무래도 어시스트와 패스에 주력한다. 오른쪽에서는 찬스 포착에 심혈을 기울인다. 찬스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맞아 떨어졌다”는 게 레바논전이 끝난 뒤 김보경의 설명이었다. 결과가 말해줬다. 왼쪽 날개로 출전한 카타르 원정에서는 2차례 어시스트를 배달했고, 오른쪽에 배치된 레바논전에서는 2골을 터뜨렸다.
한때 박지성의 빈자리보다 훨씬 고민이 컸던 이영표(밴쿠버)가 맡아왔던 왼쪽 풀백에는 박주호(FC바젤)가 등장해 이 자리를 채웠다. 더욱 재미있는 건 박주호와 이영표가 같은 에이전시에 몸 담고 있고, 오랜 시간 박주호가 대선배 이영표를 롤 모델로 삼아왔다는 사실. 롤 모델을 보며 성장했던 새까만 후배는 어느덧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수비수가 됐다. 공격적인 면에서 특히 강점을 보여줬다. 적극적인 오버래핑으로 상대 진영을 뒤흔드는 데 톡톡히 공헌했다. 김보경-박주호가 이룬 왼쪽 측면은 이번 월드컵 최종예선 초반 라운드 동안 거의 흠잡을 데 없었다.
카타르 원정을 동행 취재할 때 만난 아랍권 TV채널 알 자지라의 한 스포츠 기자는 “한국에는 끊임없이 좋은 스타들이 배출되고 있다. 부럽다. 중동은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춰버렸다. 세계적인 무대에서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이나 일본을 다른 국가들이 따라잡기 어렵다”고 갈채를 보냈다.
▲ 김보경이 레바논과 경기에서 두 번째 골을 넣은 뒤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김보경. 이종현 기자 |
최강희호는 이번 소집 기간 동안 총 26명의 선수단을 운용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베스트는 아니었다. 정강이 골절상에서 완쾌됐음에도 경기 감각 부족이 문제였던 이청용(볼턴)이나 병역 논란을 일으킨 박주영(아스널)은 아예 가세하지도 못했다.
이들이 엔트리에 포함되면 한국 축구가 훨씬 강해지는 건 당연하다. 벌써 김보경과 이청용이 이룰 좌우 날개에 큰 기대를 거는 목소리가 높다. 여기에 염기훈(경찰청), 김치우(상주 상무), 남태희(레퀴야), 손흥민(함부르크) 등 신구 측면 자원들도 있다. 엄밀하게 보면 이근호도 이들과 경쟁하는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박주영의 합류 역시 대표팀 공격라인 운용에 탄력을 더한다. 이동국과 박주영, 김신욱, 지동원(선덜랜드)이 펼칠 최전방 경쟁은 흥미를 돋울 전망이다.
이번에 출전 기회를 잡은 멤버들도 주전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박주호가 분명 한 자리를 차지한 건 맞지만 김영권(오미야)이라는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홍철(성남 일화) 등 어린 에이스들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오른쪽 풀백에서도 최효진(상주 상무)과 오범석(수원 삼성)이 번갈아가며 각각 카타르, 레바논전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명단 발표 직전에 엔트리에서 제외된 차두리(뒤셀도르프)가 가세하면 역시 경쟁이 치열해진다.
중원에서도 경쟁은 계속된다.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과 기성용(셀틱)조차 부동이 아니다. 탁월한 플레이메이커로 명성을 떨쳐온 김두현(경찰청)도 건재함을 과시했고, 김정우(전북 현대)도 있다. 카타르, 레바논전 모두 출전 명단에서는 빠졌던 박현범(수원 삼성) 또한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센터백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신임 캡틴 이정수(알 사드)와 곽태휘(울산 현대) 콤비가 중앙 수비로 호흡을 이뤘으나 2010남아공월드컵 16강 진출에 일조한 조용형(알 라이안)과 조병국(주빌로 이와타) 등도 빠질 수 없다. 김영권은 중앙에도 배치가 가능해 또 다른 경쟁 구도를 연출할 수도 있다. 비록 큰 부상을 입고 2012 런던올림픽 출전마저 좌절됐으나 분명 차세대 에이스라 할 수 있는 홍정호(제주 유나이티드)가 언젠가 가세한다면 전력은 더욱 탄탄해진다.
물론 올림픽 홍명보호 멤버들까지 고려한다면 전 연령대에 걸쳐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영진 전 대구FC 감독은 “각자가 나름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언제든 활용이 가능한 인력풀이 늘어났다는 점은 한국 축구 전반에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김보경과 구자철처럼 다양한 포지션을 맡길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들이 많은 것도 고무적이다”라고 후한 평가를 내렸다. 대표팀과 함께했던 황보관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도 “선수층이 많이 두터워졌다. 왼발, 오른발을 고루 활용할 줄 알고 골키퍼 등 특수한 포지션이 아니라면 대개 위치를 무난히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다”고 했다.
벤치의 리더십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해외파와 국내파의 공정한 경쟁 구도가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정 선수들을 선호하기보다는 고루 기회를 제공해왔다는 것. 네임밸류가 높고, 아무리 빅 클럽에서 몸담고 있다고 해도 철저히 그 시기에 걸맞은 최적의 몸 상태가 된 선수들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올해 2월 2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쿠웨이트와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최종전을 앞두고 전라남도 영암에서 소집훈련을 했을 때, “내가 대표팀을 이끄는 동안에는 국내파와 해외파라는 구분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모두가 한국 축구의 자산이고, 어느 한 명 소중하지 않은 이들이 없다”던 최 감독이었다.
누구도 자만할 틈이 없었다. 아니, 아예 그럴 기회를 일찌감치 차단했다. 대신 모두가 한마음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제자들과 소통했다. 끊임없는 칭찬은 사기를 충만하게 했다.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의 기를 살려주려 했고, 출전 멤버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도록 했다.
최강희식 축구가 빠르게 안착되고 있음을 보여준 요즘이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그땐 전화 한통 없더니…
지난 주 박주영(아스널)이 병역 논란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는 자리를 가졌다.
대한축구협회가 주선하고 2012 런던올림픽 메달을 노리는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동석한 당시 인터뷰를 통해 박주영은 “올림픽 메달로 병역 면제 같은 건 생각한 적이 없다. 단지 축구를 더 오래하고 싶은 마음에 병역 연기를 모색했고, 모나코에서 5년 이상 체류 자격을 얻어 병역 연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됐다. 병역 연기 신청은 이민을 가기 위해서도, 병역 면제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 남자로서 병역은 꼭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해명과는 관계없이 축구계에서의 시선은 분분하다. 곱지 않은 눈초리가 더욱 많은 것도 사실이다. 최근 박주영의 행보가 그런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박주영은 지난 시즌을 거의 공(?)친 뒤 극비리에 입국했고, 모든 외부 행사를 거절하다가 공신력이 없는 모교 학보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서울 모처의 한 커피숍에서 수도권 K리그 팀 동료를 만나는 모습이 노출되긴 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앞서 국가대표팀 최강희 감독과 축구협회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1, 2차전에 나설 엔트리를 선발하기 앞서 마지막 순간까지 박주영의 연락을 기다렸다. 명단 발표 새벽녘까지 밤샘 코칭스태프 회의를 하면서 박주영 측이 연락을 해줄 것을 기대했다. 또한 기자회견 등을 통해 속 시원히 입장을 밝혀줄 것을 공개적으로 전했다. 하지만 박주영은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간접적으로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다. 말을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는 입장을 흘렸다. 그랬던 박주영이 올림픽 와일드카드 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이 되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박주영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계속 소명의 기회를 줬던 최 감독이나 황보 위원장 모두 굉장히 민망하고 멋쩍은 상황에 처한 셈이다.
“국가대표팀 선발에 앞서 기자회견을 갖지 못한 건 내가 입장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표팀 선발은 전적으로 (최강희) 감독님 권한이라고 생각했다. 기자회견으로 판단에 부담을 끼치게 될까봐 걱정스러웠다”는 박주영의 해명은 전혀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수많은 취재진이 운집할 공식 기자회견이 정말 부담스러웠다면 최소한 대표팀 측에 연락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보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박주영이 스스로 멀리 돌아갔다고 밖에 보기 어렵다.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