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8일 새벽 인천공항. 현대차 관계자들이 정몽구 회장 차량을 경호하느라 취재진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등 아수라장을 연출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한 재계인사가 최근 현대차그룹의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주요 임원들의 검찰조사에 이어 총수일가의 검찰 소환 등 최대 난국을 맞고 있는 현대차 직원들은 당연히 분주할 수밖에 없다. 검찰청사와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동분서주하는 현대차 직원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정의선 기아차 사장 소환 당시 검찰청사 주변을 뒤덮은 현대차 직원들의 모습이 그룹 분위기를 대변해준다.
문제는 전력을 한데 모아 검찰조사를 막아내기도 벅찬 상황인데 집안 사정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는 점이다. 총수일가에 대한 과도한 충성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또다른 쪽에선 동시다발적으로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 공방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내부 제보자에 대한 논란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바람 잘 날이 없는 셈이다.
지난 4월 20일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검찰에 소환되기 몇 시간 전인 이른 아침 현대차 사옥 내 대강당이 300명의 현대·기아차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정 사장 소환에 대비한 이른바 직원 교육이 있었던 것이다. 기자들의 취재공세와 현대차 계열사 비정규직 직원들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교육을 마친 직원들은 정 사장 소환 직전 여러 대의 버스에 나눠 탄 뒤 검찰청에 투입(?)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급상황에 대비했다.
정 사장이 소환되던 오전 9시 35분께 정 사장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미리부터 진을 치고 있던 현대차 직원들이 취재진과 계열사 비정규직 직원들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격한 충돌 속에 고성이 오갔고 넘어지거나 옷이 찢어지는 장면도 연출됐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검찰청사에 진을 치고 있던 300명 직원들 중엔 경호업체 인력 50명도 포함돼 있었다. 정예부대(?) 역할을 맡은 50명 경호인력은 정 사장이 검찰조사를 받는 내내 검찰청사 주변에 대기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4월 8일 정몽구 회장이 미국일정을 마치고 귀국할 당시에도 현대차 직원들의 적극적인 경호로 인해 인천공항이 시끄러워지기도 했다.
총수일가를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경호를 펼친 현대차 직원들에 대해 검찰청사 주변에 있던 인사들 사이에선 ‘충성 경쟁’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반면 어딘가 일사불란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과한 물리적 충돌에 대해 ‘총수일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란 평도 나왔다. 과도한 충성 경쟁이 인천공항이나 검찰청사에서의 격한 몸싸움을 유발시켰다는 지적이다.
정 사장 소환 당시 계열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온몸으로 저지한 현대·기아차 직원들을 향해 노동자들이 “대학 나와서 뭣 하는 짓이냐” “가서 일이나 해라” 같은 비아냥거림을 쏟아냈다. 최근 들어 현대차 직원들이 저녁에 자주 술자리를 가지며 푸념을 늘어놓는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번 사태가 일단락되고 나서 지난해와 같은 대규모 인사태풍이 불어 닥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직원들 사이에 감돌고 있다.
현대차그룹 전체가 비상체제에 돌입한 상태지만 기강이 해이해져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총수일가는 물론이고 그 다음 서열인 김동진 부회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모두 검찰청사를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다보니 내부에 영(令)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임원들이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해 있다고 전해진다. 검찰 수사에 응하는 한편 총수일가 뒤치다꺼리도 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렇다 보니 임원들 간에 책임 전가 공방도 벌어진다고 한다. 한 업계 인사는 “총수일가나 임원진에 대한 처벌수위가 빨리 정해지는 게 차라리 현대차 직원들 분위기 다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했다.
일각에선 이번 일을 계기로 현대차 내부에 또 한번 인사폭풍이 부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최근 3년간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과 연배가 엇비슷한 MK사단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회장-부회장급 인사를 다수 퇴진시켰다. 왕자의 난을 전후해 두각을 나타냈던 현대그룹 출신 임원들도 다수 물러나고 MK사단의 2세대급 전문경영진이 사장단에 전진 배치됐다.
하지만 이번 현대차 비자금 사태의 배경에 2세대 MK사단의 전문 경영인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노출됐다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여기에 현대차그룹 내 최대의 주력군이기도 한 현대차 출신 임원의 ‘불만’과 ‘불안감’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현대차 내부 한켠에선 지난 2000년을 전후한 왕자의 난 이후 현대그룹이나 현대차 출신 인사들이 ‘과감’하게 잘려나갔다는 점에서 이번 비자금 사태 이후 불어닥칠 인사태풍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논공행상이 분명한 MK 특유의 리더십을 감안하면 ‘폭풍전야’라는 것이다.
‘총수 출두’라는 변고 수준의 사태를 맞이해 검찰이나 국회 주변을 바쁘게 오가든 양재동에서 있든 요즘 현대차 임직원들의 마음이 편치 않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