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을 전격 매입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오른쪽)의 경영권에 빨간불이 켜졌다. 왼쪽은 정주영 회장의 추도식에서 분향하는 정상영 명예회장(왼쪽)과 정몽준 의원. | ||
물론 이로 인해 당장 현대상선 경영권에 변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 투기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노출돼 온 현대그룹이 이젠 범 현대가인 현대중공업의 적대적 M&A(인수 합병) 사정권에 들어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숙부의 난’을 호되게 겪었던 현정은 회장은 이제 ‘시동생의 난’을 맞이할 운명에 처한 셈이다.
4월 27일 현대중공업은 외국계 자본인 골라LNG로부터 현대상선 지분 26.68%를 사들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현대중공업 측은 현대상선이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 합병 타깃이 된 만큼 소위 ‘백기사’ 역할 차원에서 현대상선 지분을 매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주요 고객인 만큼 안정적 지분 확보를 통해 양사의 ‘윈-윈’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자칭’ 백기사를 향해 발끈하고 나섰다. 이번 지분 매입과 관련해 현대중공업과 아무런 사전협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 역시 “골라LNG 측에서 현대상선 지분 매입 의사를 타진해 와서 검토 끝에 매입하게 된 것”이라 밝혔다. 현대그룹 측과의 교감은 없었던 셈이다.
현대그룹 측은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 매입을 발표한 4월 27일 당일에서야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이를 통보받았다고 한다. 현대 관계자는 “정말 백기사라면 사전 교감은 있었을 것”이라 밝힌다.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이 현대 측과의 교감 없는 지분 매입을 통해 일약 현대상선 최대주주로 올라선 과정에 주목한다. 현재 현대상선에 대한 현정은 회장의 우호지분은 23.2%다. 현대그룹에 협조적인 케이프포춘 지분 10%와 우리사주 2% 그리고 친 현정은 회장 성향의 기타 지분 4%를 합하면 39.2%로 당장 경영권 위협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정상영 KCC 명예회장 측 지분이다. 정몽헌 회장 사후 현 회장과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정 명예회장 측의 현대상선 지분은 6.26%다. 현대중공업 지분과 합하면 32.9%가 되면서 단번에 현 회장 경영권 위협 수준에 오르게 된다.
현대그룹은 옛 영광을 되찾겠다는 취지 하에 현대건설 인수를 추진 중이다. 현정은 회장 체제 출범 이후 거론돼온 정통성 논란을 불식시키는 동시에 침체된 대북사업 활성화에도 보탬이 된다는 차원에서다. 그러나 현대중공업-KCC 공조가 이뤄질 경우 현대 측의 신사업 진출에 ‘훼방꾼’ 역할까지 가능한 상황이 됐다.
그렇다면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정상영 명예회장과 협공해 현 회장과 경영권 전쟁을 벌여나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 같은 시각에 대해 현대중공업 측은 “너무 앞서간 것”이라 밝힌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은 그동안 두터운 협력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이번 지분투자를 통해 앞으로 양사 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것이란 입장이다. 적대적 인수 합병 가능성 거론은 말도 안된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시숙부의 난’을 한번 겪은 현대그룹 입장에선 현대중공업 측의 공식발표 내용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선 현대중공업이 골라LNG 측에 프리미엄을 얹어주고 지분을 매입한 것에 주목한다. 골라LNG측은 최근까지 현대상선 지분을 늘려왔다. 가장 최근의 거래는 지난 4월 14일부터 4월 21일까지 150만 주 장내매수였는데 당시 매입단가는 주당 1만 4000원에서 1만 6000원을 오가는 수준이었다. 현대중공업의 지분 매입발표 하루 전인 4월 26일 현대상선 주가는 1만 5800원이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이 지난 4월 27일 발표한 지분매입 단가는 1만 8000원이다.
골라LNG의 현대상선에 대한 마지막 지분매입 시점은 4월 21일이다. 현대중공업과의 지분 거래 합의가 불과 며칠 만에 이뤄진 것이다. 현대그룹 측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측은 골라LNG 측 지분 매입을 발표한 4월 27일 현대측에 지분매입을 결정하는 이사회를 열겠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할 틈이 없었던 현대 측이 현대중공업 측에 이사회 연기를 요청했지만 현대중공업이 일사천리로 이사회를 진행해 지분 매입을 공식화했으며 이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현대중공업의 지분 매입 발표 이후 현대상선 주가는 4월 28일 현재 1만 9200원까지 치솟았다. 전일 대비 15% 상승해 상한가를 친 것이다. 현대중공업이 경영권 대신 단기차익을 실현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셈이다.
현대중공업과 자회사인 현대미포조선은 지난해 11월 27일 현대아산 지분 13.77%(134만 주)를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택배에 매각했던 바 있다. 당시 현대중공업 측은 “투자 목적을 상실했거나 사업 연관성이 없는 불필요한 지분은 지속적으로 처분한다는 계획”이라 밝혔다. 이번 지분 매입에 대해 ‘백기사’ 성격보다는 투자를 통한 단기이익 획득 차원에서 크게는 경영권에 대한 노림수로까지 해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뭐가 됐든 현대중공업으로선 손해 볼 일이 없는 셈이다.
한편 최근 침체기에 접어든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주도권에 대한 정몽준 의원의 노림수가 작용했다는 해석도 등장했다. 가부장적인 현대가에서 선친(고 정주영 명예회장) 유업을 며느리가 아닌 아들이 하는 게 옳다는 관점에서 향후 정치적 입지를 고려한 정 의원의 장기포석이라는 관측이다.
이런 저런 관전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측은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 합병 가능성 차단과 현대상선의 안정적 경영환경 조성을 통한 양사 이익 증대 목적 외에 다른 의도는 절대 없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의도야 어떻든 간에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현대중공업의 이번 지분 매입으로 인한 최대 수혜자가 정몽준 의원이 될지 아니면 정상영 명예회장이 될지도 두고 봐야할 것이다.
또 한번 남의 손에 그룹의 향방을 맡기게 된 현정은 회장은 현대중공업의 지분 매입 발표 이후 해외일정까지 취소하며 장고에 들어갔다. 시숙부와 시동생을 번갈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