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 회장 | ||
우선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안을 통한 삼성 지분구조 변화에 이건희 장학재단이 미칠 변수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2월 국회 상임위에서 통과돼 본회의에 상정된 금산법 개정안의 골자는 삼성카드와 삼성생명의 비금융계열사 지분보유 한도를 5% 이하로 제한하는 데 있다.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 삼성카드가 갖고 있는 에버랜드 주식 25.6%에서 20.1%를,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 7.2% 중 2.2%를 각각 처분해야 한다.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 식의 순환출자구조로 이뤄지므로 금산법 개정안 적용이 그룹 지배구조에 미칠 영향이 클 것으로 관측돼 왔다.
금산법 개정안 논란이 처음 불거질 당시 삼성 관계자들은 ‘정치권의 안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우호 지분을 늘려 경영권 방어에 힘쓰겠다’는 식으로 밝혔던 바 있다. 그런데 잘만 하면 삼성그룹의 주요 계열사 경영권 방어에 이건희 장학재단이 ‘백기사’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삼성은 고 이윤형 씨 몫이었던 에버랜드 주식 8.37% 중 일부인 4.12%를 이건희 장학재단에 넘긴다고 발표했다. 장학재단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에버랜드 지분 0.88%와 합하면 5%가 된다. 당초 삼성은 윤형 씨 지분 전부를 장학재단에 넘기려다 공익재단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의 5% 이상 주주가 될 수 없는 규정 때문에 4.12%만을 넘겼다고 한다.
이건희 장학재단은 비영리 단체다. 그런데 6명 등기이사진 명단에 이재용 상무가 포함돼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 상무 외 나머지 이사진은 모두 경영과 관련 없는 교육자 출신이다(오른쪽 ‘이건희장학재단 등기이사 살펴보니’ 기사 참조). 이건희 장학재단이 갖고 있는 삼성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지 않는 이상 장학재단은 언제든지 삼성의 경영권 유지를 위한 우호지분으로 활용될 수 있는 셈이다. 금산법 개정안 적용을 받아 삼성생명이 에버랜드 지분 20.1%를 처분하더라도 장학재단의 지분 5%를 삼성생명의 우호지분으로 활용해 삼성생명이 마치 에버랜드 지분 10%를 가진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누릴 수도 있는 셈이다.
이건희-이재용 부자는 자신들이 갖고 있던 삼성전자 지분 중 일부를 이건희 장학재단에 넘겼다. 이로서 장학재단은 삼성전자 지분 0.25%를 갖게 됐다. 순환지배구조의 중심축인 에버랜드와 삼성전자의 지분 관리와 경영권 방어에 대해 이건희 장학재단이 일종의 ‘백기사’로 나설 여지가 마련된 셈이다.
이건희 일가는 삼성전자 지분을 장학재단에 넘기면서 상속세를 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비영리 목적인 까닭이다. 윤형씨 몫이었던 삼성네트웍스(2.81%) 삼성SDS(4.57%) 지분도 이번에 이건희 장학재단에 증여됐다. 공익재단에 대한 기부이기 때문에 이 역시 별도 상속세 부담이 없다.
일각에선 ‘이건희 장학재단이 삼성의 새 지주회사가 될 것’이란 진단마저 등장했다. 장학재단이 이미 여러 계열사 지분을 확보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재용 상무가 장학재단의 이사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점이나 지분 증여에 따른 상속세 부담이 없다는 점에서 ‘이건희 장학재단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디딤돌 중 하나로 쓰일 것’이란 관측마저 등장했다.
삼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8000억 원의 용처와 사용 주체는 정부와 사회의 논의 결과에 따를 것”이라 밝혀왔다. 정치권과 재계 인사들 중 이건희 장학재단이 갖게 된 삼성 계열사 지분 전체를 팔아 사회복지기금을 마련할 것이라 보는 인사는 단 한사람도 없다. 이는 삼성의 고려 대상도 아닌 것으로 알려진다.
재계의 한 인사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은 비영리 단체이기 때문에 세금 부담도 없지만 어마어마한 자산을 갖고 있으며 명예도 누리고 있다. 이건희 장학재단이 모델로 삼으려 할 것”이라 밝힌다. 이건희 장학재단이 확보한 삼성 계열사 지분을 통해 얻어지는 주식 배당금이나 기타 재투자 등으로 기금을 마련해 장학기금이나 복지자금을 마련하게 될 것이란 관측이다. 이는 ‘삼성이 약속대로 사회환원을 했다’는 평을 얻어내는 동시에 삼성 주요 계열사에 대한 우호 지분 비율 관리도 가능케 해줄 것이다. 몇몇 재계 인사는 “이건희 장학재단의 자금 운용에 대한 평이 좋게 형성되면 추후 삼성 계열사들 지분이 상속세 없는 증여 형태로 장학재단에 이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중심의 삼성그룹의 새로운 지배구조가 출현할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