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사상 첫 FA 계약 총액 5억 달러 돌파 전망 돌았지만 부상 암초 만나
투타 겸업이 쉬운 길은 아니다. 전미르보다 먼저 시도했다가 철회한 선수가 적지 않다. 2018년 신인왕에 오른 KT 위즈 강백호가 그랬다. 그는 서울고 시절부터 투수와 타자로 모두 성공할 만한 '천재'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데뷔 첫해 타자로 두각을 나타낸 뒤 이듬해인 2019년 스프링캠프에서 실제 투타 겸업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백호의 불펜 피칭 20개를 지켜 본 이강철 KT 감독이 "지금의 폼으로 투구를 반복하면 금세 부상이 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 없던 일이 됐다.
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키움의 1라운드(전체 6순위) 지명을 받은 김건희도 입단 직후부터 구단의 지원 속에 차근차근 투타 겸업을 준비했지만, 실패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지난 7월 "타자 쪽으로 방향을 정리하는 게 선수 본인과 팀, 리그 전체에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투수로의 자질보다 우타 거포로서의 재능을 키우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오타니가 연 이도류의 문
많은 천재형 선수들이 어린 시절 피칭과 타격에 모두 재능을 보인다. 다만 대부분 고교 입학 혹은 프로 입단 전,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녹록지 않은 프로 무대에선 한 가지 재능에만 온힘을 쏟아도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최근 투타 겸업을 꿈꾸는 선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의 영향이다. 그는 최근 수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를 몰고 다닌 야구선수다. 세계 최고의 무대인 메이저리그(MLB)에서 '전설의 강타자' 베이브 루스 이후 최초의 이도류(二刀流)로 독보적인 성공을 거뒀다.
심지어 루스는 '홈런 타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굳힌 뒤엔 투수로 등판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1920년부터 은퇴하던 1934년까지 단 다섯 경기에서만 마운드에 올랐다. 오타니는 그런 루스 이후 처음으로 나타난 '진짜' 이도류다. 지명타자로 풀타임 출장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선발투수로 등판하는데, 양쪽 모두 리그 정상급 성적을 낸다. 심지어 시속 165㎞의 강속구를 던지고, 비거리 140m짜리 초대형 홈런을 친다. 오타니 이전엔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영역이다.
이런 오타니도 처음엔 회의적인 시선에 부딪혔다. 초반엔 '프로야구 선수의 투타 겸업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바람직한 선택인가'라는 논란이 뜨겁게 일기도 했다. 그러나 오타니가 투수와 타자로 모두 좋은 성적을 내자 야구계의 반응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타니 개인의 성공을 넘어 구단들과 특급 유망주들의 시야도 확장됐다. 미국 스포츠전문매체 '디 애슬레틱'은 최근 "MLB 스카우트들이 미국 전역의 고교에서 '제2의 오타니 찾기'에 여념이 없다"며 투타에서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유한 학생 선수 몇몇을 조명하기도 했다. MLB를 꿈꾸는 학생 선수들에게 '투수'와 '타자' 이외의 다른 선택지 하나가 더 생긴 셈이다.
오타니가 처음 투타 겸업을 결심한 건 고교 3학년 때인 2012년이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 니혼햄 파이터스를 지휘하던 구리야마 히데키 감독은 일찌감치 1라운드 지명자로 점찍었던 오타니가 MLB로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가정 방문까지 해가며 영입에 공을 들였다. 이때 오타니에게 "너를 투타 모두 일류 선수로 만들어 주고 싶다"며 본격적으로 '이도류' 계획을 언급했다. 투수와 타자 중 어느 쪽도 포기하기 어려웠던 오타니가 일본 프로야구로 마음을 돌린 결정적 계기였다.
실제로 오타니는 고교 시절 통산 홈런 56개를 때려냈던 강타자였다. 일부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레전드 타자 다카하시 요시노부나 뉴욕 양키스 중심타자였던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와 비교하기도 했다. 전설적인 강타자 오 사다하루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이 "오타니는 내 기록을 뛰어넘을 만한 선수"라고 칭찬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오타니의 고교 시절 은사와 많은 야구 전문가들이 오타니의 포지션을 '투수'로 기정사실화하자 스스로 혼란스러워했다. 오타니는 당시 "나는 늘 투수보다 타자에 더 자신 있었다. 그래서 '왜 나는 투수로서의 평가가 더 높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던 참이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니혼햄의 '이도류' 카드는 제대로 통했다. 오타니는 '투수'로만 관심을 집중했던 MLB 구단들 대신 니혼햄을 선택했다. 일본 언론은 훗날 "오타니가 MLB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투타 겸업은 못 했을 것이다. 그의 니혼햄 입단이 야구 역사에 새 길을 열었다"고 썼다.
#모두가 반대했던 이도류
오타니는 정작 프로 첫 시즌인 2013년엔 부상이 겹쳐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지 못했다. 투수로 13경기에 등판해 3승(평균자책점 4.23)을 올리는 데 그쳤고, 타석에선 타율 0.238에 홈런 3개를 때렸다. 그러나 이듬해인 2014년부터 이도류로 진가를 보이기 시작했다. 투수로 11승 4패, 평균자책점 2.61을 기록하면서 타자로는 타율 0.274, 홈런 10개를 쳤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한 시즌 10승과 10홈런을 동시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기록됐다. 그해 일본시리즈에서도 투타 모두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고, 투수와 지명타자 부문 베스트 9에 나란히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역시 오타니였다.
이때부터 오타니의 투타 겸업을 둘러싸고 본격적인 논란이 시작됐다. 야구 기술이 발전한 현대 야구에선 "여전히 무모한 도전이다. 오래 가지 못할 거다"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에이스가 4번 타자로도 나서는 고교야구와 선수 각자가 자신의 포지션에 전문화된 프로야구는 큰 차이가 있다는 얘기였다. 심지어 일본의 전설적인 타자 장훈은 "프로야구는 동네 야구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특히 반대하는 야구인 대부분이 "오타니가 타자를 멈추고 투수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타자인 나가시마 시게오 전 요미우리 감독은 "오타니는 '1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선수'가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나온 선수'라며 "타자도 좋겠지만, 나는 그가 '투수'라고 본다. 다른 일본인에게 없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전설적인 포수 출신인 노무라 가쓰야 전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도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하나도 못 잡을 수 있다. 내가 감독이라면 투수로 기용할 거다. 타자로는 언제든 전향할 수 있지만, 시속 160㎞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타니에게 니혼햄 시절 자신의 등번호(11번)을 물려줬던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조차 당시엔 "오타니가 '넘버 원'이 될 수 있는 분야는 투수다. 최고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잡는 게 좋다"며 "투타 겸업이 야구 인기를 고려했을 때는 흥미로운 일이겠지만, 그걸 계속 한다면 언젠가 발목이 잡혀 MLB에 진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MLB에서 뛴 아시아 타자 중 가장 위대한 선수로 남은 스즈키 이치로가 유일하게 "오타니가 타자를 했으면 좋겠다. 그 정도의 타격을 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고 다른 의견을 냈을 뿐이다.
그러나 오타니는 보란 듯 계속 승승장구했다. 2년 뒤인 2016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10승-100안타-20홈런 기록을 세우면서 니혼햄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또 다시 투수와 지명타자로 각각 베스트9에 뽑히면서 정규시즌 MVP로 선정됐다. "오타니를 말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쏙 들어갔다. 오히려 오치아이 히로미쓰 전 주니치 드래곤스 감독은 "선수 자신이 투타 겸업을 꼭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싹을 자를 필요가 있겠는가. 오타니의 선택에 맡기고, 본인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된다"고 했다. 오타니 이전에 MLB에서 거포로 성공을 거둔 마쓰이도 "스스로 가능하다고 느낀다면, 양쪽 다 계속하는 게 낫다"고 지지했다. 오 사다하루 회장은 "기본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200승과 2000안타 중 어느 쪽을 달성해야 할지 너무 고민되는 선수라면 둘 다 하면 된다"고 격려했다.
#MLB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잦아드는 듯했던 '투타 겸업' 논란은 오타니가 MLB에 진출한 2018년 다시 불이 붙었다. MLB는 일본 프로야구와 또 다른 수준의 리그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설상가상으로 오타니가 첫 시범경기에서 부진하자 미국 언론은 "차라리 지금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MLB는 (한 선수가 투수와 타자를 함께할 수 있는) 변두리 야구가 아니다"라며 조롱 가득한 비난을 쏟아냈다. 한동안 그를 괴롭힌 부상도 갑론을박을 부추겼다. 오타니가 첫 시즌 후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고 재활한 탓에 MLB에서의 첫 3년간 투수와 타자로 동시에 활약한 기간은 2개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시 "투수 쪽에 전념하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이유다.
그러나 부상을 털어낸 오타니가 2021년부터 이도류로 본격적인 신기원을 열기 시작하자 반응은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 언론은 다시 앞다퉈 "오타니가 투타 겸업에 부정적이던 사람들을 침묵시켰다" "일본의 오타니가 아니라 '미국의 오타니'가 됐다" "반칙 같은 직구와 악마 같은 스플리터를 던진다" "오타니는 지구인이 아니라 외계인이라는 게 확실해졌다"와 같은 찬사가 이어졌다. 급기야 미국의 유명 야구 기자인 '야후스포츠'의 제프 파산은 오타니에게 자신의 오판을 사과하는 칼럼까지 게재했다. "친애하는 오타니 씨. 내가 당신을 완전히 잘못 판단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다"며 "MLB에서 투타 겸업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내 예측은 실수였다. 당신 덕분에 시즌 시작 전 선수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이례적인 글을 썼다.
MLB 역사상 가장 빛나는 아이콘으로 자리를 굳히던 오타니는 다만 올해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8월 24일(한국시간) 신시내티 레즈전에 선발 투수 겸 2번 지명타자로 출전했지만, 2회 원아웃까지 잡고 오른팔에 불편함을 느껴 스스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직구 평균 구속도 시즌 평균보다 시속 6㎞ 느린 150㎞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결국 경기 후 정밀 검진을 받았고, 팔꿈치 인대 부상을 확인해 남은 시즌 투수로 등판하지 못하게 됐다. 이도류의 한쪽 칼을 잠시 집어넣게 된 셈이다.
오타니는 이후 "타자로라도 경기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여 매일 경기에 나섰지만, 9월 5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을 앞두고 타격 훈련을 하다 옆구리 근육을 다쳤다. 필 네빈 에인절스 감독은 "염증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 하루이틀 쉬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낙관하면서 오타니를 부상자 명단(IL)에 올리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공백은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오타니는 9월 15일까지 10경기 연속 결장했다.
심지어 12일에는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원정경기에 앞서 선발 라인업에 2번 지명타자로 이름이 올라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빠지고 마이크 무스타카스가 들어가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네빈 감독은 "오타니가 이제 경기에 나설 준비가 된 것으로 확신했지만, 야구장에서 치료와 타격 훈련을 마친 뒤 '아직 100%가 아니다'라고 하더라. 상황을 이해하고 다시 라인업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MLB닷컴도 "앞선 7경기에 결장한 오타니는 시애틀전 출전을 무척 원했지만, 경기 전 스윙 때 완전히 회복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오타니는 그 후 두 경기도 여전히 벤치에서 지켜봤다.
오타니가 홈런 44개를 치고 부상으로 멈춰선 사이, MLB 전체 홈런 선두 자리와 올 시즌 첫 50홈런 기록도 경쟁자인 맷 올슨(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이 가져갔다. 올슨은 9월 6일 시즌 45호포를 때려 한발 앞서나갔고, 12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전에서 시즌 49호와 50호 홈런을 연거푸 터트려 격차를 더 벌렸다. 13일엔 51호포도 쏘아 올렸다.
투타 겸업으로 MLB에 거대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오타니는 올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FA)가 된다. 지난달 중순까지만 해도 그가 MLB 사상 최초로 FA 계약 총액 5억 달러(약 6618억 원)를 돌파할 거라는 장밋빛 전망이 쏟아졌다. 그러나 올 시즌 막바지에 투타에서 모두 쉼표를 찍으면서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났다. 역시나 "투타 겸업 탓에 몸에 무리가 왔다"는 분석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탄탄대로를 걷던 '초인(超人)' 오타니의 시련에 빅리그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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