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검찰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에 대해 막바지 수사를 펼치고 있다. 이미 1심에서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건희-이재용 총수부자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힐 구체적 혐의를 찾아내지는 못한 상황이다. 삼성 또한 지금까지 유지해온 ‘총수일가 무소환 신화’를 이어가기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그런데 삼성을 불안케 하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때 삼성그룹에 몸담았던 인사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망이 점점 날카로워지는 까닭에서다. 이들은 모두 그룹과 핵심계열사 요직에 있었으며 이 회장의 총애가 두터웠던 인사들이다. 재계 인사들은 삼성 총수일가를 옭아맬 수 있는 발언이 이들 입에서 나올 가능성을 희박하게 여겨왔다. 삼성의 사후 인사관리 시스템이 다른 기업에 비해 우월했던 탓이다. 이는 지난해 현대차그룹에서 단행한 ‘MK 1세대’ 임원들 수시인사와 곧잘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망이 몇몇 삼성 출신 인사들을 향해 좁혀오는 상황을 보면 삼성그룹이 팔짱끼고 앉아 여유 있게 관망할 처지가 못 될 것이란 지적이다. 검찰 수사기법을 고려할 때 이들이 ‘딥스로트’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자사 출신 인사들에 대한 사후 처우에서 다른 기업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 왔다. 이는 ‘한번 삼성맨은 영원한 삼성맨’이라는 우월의식 고취와 함께 삼성그룹 내 중요 기밀사항에 대한 외부 누설을 막기 위한 차원에서였다. 삼성 고위직을 거친 주요 인사들에 대해선 퇴사 후 몇 년간 재직 시와 같은 대우를 해주며 타사 입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제시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삼성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르내리면서 삼성의 사후 관리 신화에 금이 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건희-이재용 부자 승계과정 같은 기밀사항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이들 인사들의 인내력이 검찰수사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시선이 가는 인물은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다. 삼성에버랜드가 전환사채(CB)를 발행한 지난 1996년 당시 그는 그룹 비서실장이었다. 총수일가 후계승계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검찰은 현 전 회장을 상대로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당시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씨 등에게 저가에 배정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룹 차원의 공모가 있었는가’에 대한 구체적 진술을 얻어내려 하고 있다.
5·31 지방선거 낙선 이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오던 현 전 회장은 지난 6월 26일 검찰의 첫 소환에 응했다. 이 자리에서 현 전 회장은 에버랜드 편법 증여와 관련해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3일 후 현 전 회장을 재소환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수사 관행에 대해 “정황이나 물증을 확보하지 않고는 거물급 인사 소환을 추진하는 법이 없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기법상 소환 대상자가 당혹스러워 할 다른 정황을 먼저 제시한 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어 검찰이 원하는 사건에 대한 답변을 얻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소환 조사가 거듭될수록 삼성과 이건희 회장 입장에선 초조해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현 전 회장의 정치권행을 두고 이건희-현명관 관계를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도 있다. 지난해 말부터 정치권은 지방선거 출마자 선정을 위해 삼성 전·현직 CEO들을 잇달아 접촉했다. 당초 여권행이 유력했던 현 전 회장은 한나라당행을 택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한나라당은 윤종용 삼성 부회장과 삼성 출신인 황영기 우리은행장을 여러 차례 접촉했지만 윤 부회장과 황 행장의 고사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윤종용 황영기 두 인사의 정치권 접촉에 대해 이 회장이 사전보고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들이 정치권의 간곡한 손짓을 거절한 것과 대조적으로 현 전 회장이 정치권행을 택한 것에 대해 이건희-현명관 두 사람 사이에 ‘이상 조짐’이 생겼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인사들이 생겨났다.
김재록 게이트에 이은 검찰의 이헌재 사단 본격수사로 인해 주목받는 황영기 우리은행장과 박해춘 LG카드 사장도 삼성 고위직 출신 인사다. 이헌재 사단 핵심인사로 주목받는 황 행장은 이 회장 취임 초기인 지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 비서실에 근무했다. 지난 2004년까지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에서 고위직을 지낸 뒤 우리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때 이 회장의 외국인사 접견 시 통역을 전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이 회장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박해춘 LG카드 사장은 지난 1998년까지 주력 계열사 중 하나인 삼성화재 임원으로 재직하다 서울보증보험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헌재 사단으로 분류되기 시작한 인물이다.
이헌재 사단 일원인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구속 직후 검찰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헌재 전 부총리에 대한 계좌추적 그리고 외환은행 본점과 이강원 전 행장 자택 압수수색까지 이뤄지면서 정·관·재계 인사들 사이에 이헌재 사단 인사들의 줄소환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 사건의 시발점이 된 김재록 씨 구속 이후 김 씨의 우리은행 대출 압력 시도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면서 이헌재 사단 일원이자 현 우리은행장인 황 행장과 김 씨의 인연이 주목을 받아왔다. 박해춘 사장은 김 씨 구속직전까지 자주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져 LG카드 매각을 앞두고 두 사람이 사업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관측까지 등장한 상태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이헌재 사단 조사과정에서 핀치에 몰린 인사들이 검찰이 원하는 ‘다른 것’을 내놓을 수도 있다. 실제로 검찰이 이런 기법을 통해 많은 성과를 올려왔다”고 전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김재록 씨 구속수사와 현대차 압수수색에 이은 정몽구 회장 구속, 외환은행 헐값매각 의혹과 변양호 전 국장 구속을 대검 중수부가 모두 전담해왔다는 사실이다. 이헌재 사단에 대한 무더기 소환이 이뤄질 경우 대검 중수부라는 한 공간 안에서 검찰이 ‘그들’로부터 특정집단 수사에 필요한 진술을 얻어내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한 재계 인사는 “삼성 직원들은 물론이고 업계 정보맨들 사이에서 황영기 박해춘 두 사람의 근황에 대한 정보 캐기가 잦아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그러나 황 행장과 박 사장에 대한 구체적 소환일정이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삼성 총수일가 관련 수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관측이 무의미하다는 시각도 있다.
얼마 전 이건희 회장은 자택 겸 집무실로 활용해온 서울 이태원동 승지원에서 주요 계열사 사장단을 모아놓고 “자만하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고 한다. 최근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자신의 옛 측근들을 보며 불안한 속내를 드러낸 건 아닌지 일부에서는 추측도 해보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