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루니’로 불렸지만 부상 후유증 탓 이른 작별 인사…“각팀에서 남긴 나름의 성과가 자부심”
이종호는 여전히 다부진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운동에서 자유로워진 여유로운 근황을 전했다. "축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설 명절을 가족들과 함께 보낸 것 같다. 현재는 별다른 일 없이 쉬고 있다. 내가 은퇴를 하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딸 은효다"라며 웃었다.
이종호는 올해로 32세를 맞았다. 김진수, 손흥민 등 동기들은 여전히 전성기 활약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른 은퇴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었다. 정강이 쪽 뼈가 골절되며 발목 부위 인대가 다 끊어졌다. 자신의 결혼식에 가마를 타고 입장을 해야 했을 정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은퇴 선택에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부상이다. 다치는 과정이 너무 안 좋았다. 수술이 필요한 부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결과적으로 부상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당연히 쉽게 회복될 줄 알았는데 전성기 몸 상태로 돌아가기 힘들었다."
부상 시점은 2017년 12월. 2023시즌이 끝나고서야 은퇴를 선언했으나 그라운드를 떠나는 것에 대해 고민한 기간은 길었다. 그는 "몸 상태를 끌어올리려 나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며 "그러다 내 퍼포먼스로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스스로 내 플레이에 납득이 안된다면 떠나자는 마음을 먹었다. 2020년 전남으로 이적하면서는 은퇴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미련 없이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데는 지난해 활약이 있었다. 이종호는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남기지 못하면 될 때까지 계속 더 하려고 했다"며 "아주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년에 성남에서 공격포인트 10개(7골 3도움)를 기록했다. '좋은 기억을 안고 떠나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른 나이 은퇴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종호는 그의 말대로 좋은 기억을 더 많이 남긴 선수다. 그는 "은퇴를 결정하고 나서 주변 선배들이 '아쉽지만 너 정도면 충분히 이룰 것 다 이루고 성공한 선수다. 팬들이 기억해주고 많이 사랑받지 않았냐'고 하시더라.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했다"고 전했다.
주위의 평가대로 그는 프로 무대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태극마크를 달고 각종 연령별 대표는 물론 A매치에서 골맛도 봤다. 그는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성인 월드컵에 뛰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U-17 월드컵 8강, U-20 월드컵 16강의 현장에 함께했고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종호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축구계 모든 시선을 사로잡은 각광받는 자원이었다. 영광의 시대, 시작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와 축구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전남 순천 출신이다. 아버지께서 전남 드래곤즈 직원이셨다. 축구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전남이 인기가 많아 경기장을 들어가기도 어려웠는데 나는 항상 좋은 자리에서 축구를 봤다(웃음). 쉬는 날이면 김태영·노상래 등 삼촌들과 함께 놀러 다니기도 했다. 자연스레 공놀이를 좋아했고 학교 대표로 육상대회도 나가는 등 운동 능력이 좀 있어서 축구부에 스카우트됐다."
재능을 빛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등 6학년 때 전국 최고 초등선수에게 주는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했다. 이종호 이전 이동국·박지성·기성용 등이 수상했고 이후로는 황희찬·백승호 등이 영광을 안았다. 그는 "자랑 좀 해도 될지 모르겠다(웃음). 저는 장려상, 우수상 아니고 대상이다. 이제는 은퇴를 해서 얘기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하겠다"라며 "그리고 그해 대한축구협회에서 시상하는 올해의 선수상도 받았다. 한 해에 그 두 상을 동시에 받은 선수는 내가 처음이라고 하더라. 그때 감독님이 참 좋아하셨던 것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중학교로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전남 드래곤즈 구단과 인연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전남 유스팀인 광양제철중·고에 차례로 진학했다. 그는 "그때는 K리그 구단들이 의무적으로 유스팀을 운영하던 시절이 아니다. 중학교 유스팀은 전국에 전남·울산·포항 3곳뿐이었다. 자연스레 전국에서 잘하는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종호는 스스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하지만 그는 학창시절 내내 같은 세대 최고의 선수로 통했다. 언제나 연령별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고 세계 대회에도 나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이 주최하는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성인 무대에서도 그를 주목했다. 고교시절 이미 연고지 광양과 월드스타 웨인 루니의 이름을 따 ‘광양 루니’라는 애칭이 생길 정도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정도 완성이 됐던 것 같다. 주변에서 많이 기대를 해주셨다. 나도 자신감이 있었다. 함께 고등학교 때 뛰던 형들이 전남 입단하자마자 다들 잘했다. 윤석영 형이 그랬고 지동원 형도 잘했다. 나도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 부딪힌 프로의 벽은 높았다. 18경기 출전, 2골 3도움으로 신인으로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겼으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축구선수를 꿈꾸는 어린 친구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학생 시선에서 K리그를 바라보면 느려 보이고, 자신이 들어가면 금방이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평소에 유럽 축구를 보니까…나도 그랬다. 그런데 딱 들어가면 패스 컨트롤부터 다르다. 완전히 다른 축구를 해야 한다. 그게 적응이 안되면 점차 주눅이 들기 시작한다(웃음)."
이종호는 전남에서 첫 5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데뷔 시즌으로 꼽는다. 그 중에서도 강렬한 기억은 데뷔골 순간이다. 그는 "어린 시절 내가 꿈꾸던 무대에서 골을 넣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골을 넣고 곧장 광앙축구전용구장의 상징인 '철창'에 매달려 친한 형님들이던 서포터즈와 기쁨을 나눴다.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다"라고 설명했다.
프로무대 안착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2012년에 하석주 감독님, 노상래 코치님이 부임하면서 축구에 눈을 좀 떴다"며 "2014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딸 수 있었던 것도 그분들 덕분이다"라고 했다.
그러던 이종호는 리그를 지배하던 전북 현대로 이적했다. 당시 유럽 진출의 기회도 있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른다. 에이전트의 말을 전해 들은 것이다. 네덜란드 쪽에서 관심이 많았고 황희찬이 뛰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도 연결됐다. 전북 이적 앞두고 최종 저울질을 했던 팀은 독일 라이프치히다. 국내에서 더 배우고 증명해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국내 무대에 남는 것을 택했다. 경험이 없던 해외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전북·울산 등 강팀에서도 주요 공격 자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2017년 불의의 부상으로 상승세가 꺾였다. 이후 일본 임대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고 친정팀 전남과 성남을 거쳐, 이제 은퇴했다. 그는 "각 팀에서 나름의 결과를 냈다는 점은 나의 자부심이다"라며 "전북에서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 울산에서 구단 최초 코리아컵(당시 FA컵) 우승을 이뤄냈다. 전남으로 돌아가서는 2부리그 팀으로선 처음으로 코리아컵에서 우승했다. 다만 성남에서는 팬들이 원하시는 결과를 얻지 못해 죄송스럽고 아쉽다"고 말했다.
이종호는 그의 말대로 가는 팀마다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선수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내준 팬들을 향해 "나는 항상 어떻게 하면 팀이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팬들이 좋아할지 생각하는 선수였다. 그걸 알아주셔서 팬들이 예뻐해 주신 것 같다. 항상 감사한 마음 갖고 있다"며 "내가 뛰었던 곳인 K리그를 항상 사랑했고 앞으로 더 응원할 것이다. 더 편하게 팬들과 함께 축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빠른 시일 내에 축구와 관련된 일로 인사드리겠다"는 말을 남겼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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