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복귀 후손들 허드렛일 전전…임대주택 우선 입주 제도도 수천만 원 보증금 탓 ‘언감생심’
국가보훈부가 포상 대상으로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지난 8월 기준 총 1만 8139명. 현행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독립유공자의 배우자나 자녀, 손자녀 등 유족 중 정부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수권자는 유공자 1명당 유족 ‘1명’으로 제한돼 있다. 유공자 일가마다 대표 유족(후손) 1명에게 보상금을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거주하는 유족 총 9만 590명(지난 6월 기준) 가운데 8747명(9.6%)이 월 100만~300만 원의 정부 보상금을 받고 있다. 보상금액은 △건국훈장(1~5등급)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등 포상 등급에 따라 배우자는 월 90만~318만 원, 기타 유족(자녀‧손자녀 등)은 월 89만~275만 원이다.
정부는 보상금 지급 대상이 아닌 나머지 유족들(90.4%) 중 생계곤란자(중위소득의 70% 이하)에 대해서도 2018년부터 ‘생활지원금’ 제도를 신설 도입해 월 35만~48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생활 형편이 극도로 어려운 유족들에게 최저 생계‧주거운영비로는 많이 부족한 수준이다. 치솟는 생활물가를 고려해 지원 금액을 높여주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생활지원금(상한액)은 2019년 46만 8000원에서 2023년 47만 8000원으로 4년 새 1만 원 인상(인상률 2.1%)에 그쳐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상승률(12.2%)에 크게 못 미친다.
생계 곤란 유족 상당수는 수십만 원 월세를 내야 하는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어려워 가건물이나 판잣집, 비닐하우스, 친척집 등에 머무는 경우도 많다. 기본 수백~수천만 원인 월세 주택 보증금을 마련하는 것은 더욱 버겁다.
정부가 ‘무주택’ 상태인 유족들에 한해 공공임대주택 ‘우선 입주’ 신청 제도를 운영 중이지만 월세나 보증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실제 이용률은 저조하다. 지난 25일 국가보훈부에서 받은 ‘독립유공자 후손 주택 우선공급제도 이용자 현황’을 보면 연간 신청자는 1200명 안팎인데, 실제 이용자는 2022년 52명(4.1%), 2023년 20명(1.71%), 2024년 4명(0.35%)에 그쳤다.
보상금 비수권자인 박용식 할아버지(75‧독립운동가 박건 선생 친손자)는 지난 3월 경기 남양주시에 들어서는 한 공공임대주택 ‘우선 입주 신청’ 안내 문자를 받았지만 월세‧보증금을 감당할 형편이 못 돼 신청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박 할아버지가 현재 배우자, 손자 1명 등과 함께 거주 중인 서울 구로구의 한 낡은 주택 임대료는 보증금 2000만 원에 월 40만 원. 정부의 안내를 받은 남양주 공공임대주택 임대료는 전용면적 51㎡ 기준 월 47만~50만 원(보증금 4400만 원), 전용면적 59㎡ 기준 월 57만 원(보증금 5500만~5600만 원)이다. 현재 주거지와 비교해 임대료는 10만 원 안팎, 보증금은 2000만~3000만 원 이상 높다. 한 달 수입이 유족 생활지원금(34만 원)과 부부 기초연금(54만 원)을 합해 108만 원이 전부인 박 할아버지에게 공공임대주택 임대료는 부담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국가보훈부는 “유족이 우선 입주할 수 있는 주택 물량이 확보돼도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입주를 희망하지 않는 경우가 다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유족 단체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이상욱 독립유공자유족회 이사는 “유족들이 대부분 수천만 원의 보증금을 낼 돈이 없는 데다 월 임대료가 30만~40만 원대인 생활지원금 수준을 웃돌다보니 사실상 임대주택 우선 입주 신청 제도를 이용할 수 없다”며 “예우를 하겠다는 정책 취지가 있다면 보증금은 거의 없이, 월세만 기존 생활지원금 수준에서 낼 수 있도록 조정해 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현재 독립유공자 유족 가운데 60대 이상은 61%, 사실상 경제활동이 어려운 80대 이상도 14%를 차지한다. 2018년 이뤄진 ‘국가보훈대상자 생활실태조사’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3대까지)의 75.9%가 비경제 활동인구, 66%는 신고 소득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독립유공자 유족은 △국가유공자 △5‧18민주유공자 △군인‧경찰‧소방 보훈보상대상자 등 다른 보훈보상 부문과 비교해 생계 활동이 어려운 고연령자 비율이 더욱 높은 편이다. 독립유공자들은 고문‧옥살이 과정 등에서 신체‧건강이 상하거나 일찍 사망해 집안의 생계가 주저앉았고, 남은 유족에 대해서도 일제의 감시와 경제활동 제재가 이어져 극도의 가난이 대물림된 경우가 많다.
감시를 피해 일가 전체가 만주나 연해주, 중앙아시아 등으로 이주했다가 자녀나 손자녀가 건국 이후 국내로 돌아온 뒤 허드렛일 외에 마땅한 경제수단을 마련하기 어려워 생계 곤란이 이어진 경우도 많다.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최진동 장군의 외손녀인 고 조숙영 할머니는 중국에서 태어나 거주하다 2009년 국내로 이주한 뒤에도 언어 문제 등으로 일자리를 마련하기가 힘들었고, 생계활동에 어려움을 겪다 지난 7월 별세했다.
유족들 중 일부는 집안 내에서 보상금을 받고 있는 수권자 유족과 일찌감치 거주지역이 분리됐거나 교류가 끊어져 보상금을 공유할 사정이 못돼 홀로 전적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도 있다.
독립운동 유족단체들은 현재 프랑스가 매년 수십조 원의 예산을 편성해 독일 나치 체제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 후손 대부분(450만여 명)에게 경제지원과 양로원 등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사례를 비롯해 해외 모델을 주목한다. 임인숙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팀장은 “선대의 독립운동으로 집안 전체가 무너진 뒤 평생 가난과 싸워온 유족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국가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정치권에서는 독립유공자 1명당 유족 1명으로 한정돼 있는 ‘보상금 지급 대상 범위’를 넓히는 법개정 움직임도 보인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8월 14일 이를 위한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안 의원은 지난 25일 통화에서 “독립유공자 수권 유족의 범위를 확대하는 등 좀 더 많은 유족들을 보훈 혜택으로 예우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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