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유상증자 등 지배주주 중심 경영 행보 잇달아 제동…상법 개정되면 ‘가속화’ 가능성
국내 재계 주요 그룹 대다수는 승계를 통한 지배주주 중심의 경영을 하고 있다. 2024년 공정거래위원회 지정 대규모기업집단 60대 그룹 가운데 창업주가 아닌 지배주주 일가가 경영하는 곳은 34곳에 달했다. 다수 그룹은 이미 3~4세 경영인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26곳 가운데 11곳은 창업주가 경영하고 있지만 자녀에게 승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결과적으로 60대 그룹 가운데 지배주주 일가 중심의 경영을 하고 있는 곳은 45곳으로서 60대 그룹의 75%가 지배주주 중심의 경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창업주가 다음 세대에 경영권을 승계하는 방식은 한국 재계의 큰 특징으로 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는 상속·증여세가 높은 국가라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일반적인 방식으로 승계를 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 경영권을 승계하려면 주식을 물려줘야 하는데 최대 60%의 세금이 발생한다. 산술적으로 3세 경영인까지 내려간다면 단순 상속으로 최대주주 신분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이미 3~4세 시대를 맞고 있고, 지배주주일가가 최대주주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이창민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재계 주요 그룹의 승계 과정을 보면 지분 상속·증여를 통한 승계는 드물다”며 “기업을 쪼개고 합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음 세대 경영인이 지배구조 최상단에 있는 경영권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승계자의 이익을 위해 소액주주들의 이익이 훼손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재계의 이런 '관행'에 올해 들어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지배주주 일가의 자의적 변화가 아닌 외부 시선과 행동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올해 들어 일반주주들의 권익 훼손이 예상되는 경영진의 판단에 잇달아 제동이 걸린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재계 17위 두산그룹은 두산에너빌리티 자회사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 자회사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추진했다. 두산에너빌리티를 사업회사와 두산밥캣을 보유한 투자회사로 분리한 후 투자회사를 두산로보틱스와 합병한 뒤 두산밥캣 일반주주에게 두산로보틱스의 지분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두산밥캣을 상장폐지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삿밥캣 일반주주들은 이들 회사의 가치가 저평가되고, 지배주주일가 지분이 많은 두산로보틱스 가치를 고평가하는 방식으로 지배주주에게 이익을 몰아줬다며 반발했다.
감독당국도 제동을 걸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두산그룹의 합병 추진안이 발표되자 한 세미나에 참석해 "합병이나 공개매수 등의 과정에서 지배주주만을 위한 의사결정으로 국내외 투자자들이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후 이복현 원장은 두산그룹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며 합병을 위한 증권신고서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두산그룹은 계획안을 대거 수정한 뒤에야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두산에너빌리티 가치를 높게 책정한 주식 교환 비율을 산정해 기존안보다 두산에너빌리티 주주에게 유리하도록 바꾸고 두산밥캣의 상장폐지 계획도 철회했다.
재계 32위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진행한 유상증자도 일반주주의 피해가 예상되면서 중단됐다. 고려아연은 2조 7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이 마무리되자 2조 5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특히 자사주를 주당 83만 원에 매입한 고려아연이 불과 일 주일 만에 주당 67만 원에 유상증자를 추진하겠다고 하자 주주들에게 큰 손해를 입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비난 목소리가 커지자 고려아연은 유상증자 계획을 철회해야 했다. 여론이 악화된 이후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맡았던 최 씨 일가의 우호 지분도 대거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계 57위 HL홀딩스가 163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신설 재단법인에 무상증여하려던 계획도 일반주주들을 당혹케 했다. HL홀딩스 측은 “사회적 책무 실행을 위해 재단법인에 무상 출연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반투자자는 재단법인을 통해 지배주주 일가의 경영권을 강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HL홀딩스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HL홀딩스는 재단법인에 대한 자사주 무상증여를 철회하기로 공시하면서 마무리됐다.
이 사례들은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그동안 일반주주의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밀어붙이던 과거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김우진 서울대학교 경영학 교수는 “과거 일반투자자들은 자신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국내외 투자자가 늘어나고 투자 경험이 축적되면서 자신의 권리에 대한 개념이 선명해지고 있다”며 “두산그룹 사례처럼 향후 지배주주 일가의 이익을 몰아주기 위한 대기업들의 편법은 통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배주주를 위한 꼼수 경영에 제동이 걸리는 사례가 늘면서 국내 주요 그룹의 지배구조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길지 관심이 모아진다. 다만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반주주의 권익을 침해하고 지배주주를 위한 경영적 판단이 의심되는 △두산밥캣 합병 △고려아연 유상증자 △HL홀딩스 자사주 무상증여 등은 모두 이사회 결의가 있었기에 추진이 가능했다. 이사회가 소액주주를 비롯한 일반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견제를 하지 못한 것이다.
현행 상법상 이사회 충실의무가 ‘회사’에 국한돼 있어 회사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한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손익이 발생해도 이사들에게 책임이 없다. 이 때문에 이사회의 의무를 확장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사 충실의무를 기존 회사에서 모든 주주로 확장하는 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삼고 추진 중이다. 재계와 여당의 반발을 뚫고 상법 개정안이 도입될지 관심이 고조된다.
박승희 삼성 사장, 이형희 SK 위원장, 김동욱 현대차 부사장, 차동석 LG 사장 등 재계 16개 그룹 사장들은 상법 개정안 추진에 우려의 뜻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기업들은 소송 남발과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에 시달려 이사회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지고 신성장동력 발굴에도 상당한 애로를 겪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상법 개정안에 대해 비슷한 우려를 나타내면서 소액주주 권익 보호를 위한 자본시장법으로 핏셋 규제를 하자고 제안했다. 사례별로 자본시장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다만 핀셋 규제를 통해 효과적으로 일반주주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앞선 세 사례(합병·유상증자·무상증여)는 각기 다른 유형으로 일반주주 권익을 훼손하는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 이외에도 회사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일반주주 권익을 훼손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례에 맞춰 자본시장법을 개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전 회장은 "그동안 공정거래위원회가 특정 지배주주를 위한 부당거래를 막으면 또 새로운 수탈구조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수십 년을 보냈다"며 "상법 개정과 같은 근본적인 원칙을 도입하지 않으면 새로운 수탈구조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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