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법, 이재용 회장 19개 혐의 전부 무죄 선고
지난 2월 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는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시세 조종, 업무상 배임, 외부감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회장에게 19개 혐의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2024년 2월 나온 1심 판단과 같은 결과다. 이 회장과 함께 기소된 삼성그룹 전·현직 임원 등 나머지 피고인 13명도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앞서 이 회장은 2020년 9월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2023년 11월 이 회장에게 징역 5년과 벌금 5억 원을 구형했다.
이재용 회장은 2015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주도하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부당하게 추진한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이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합병 과정에서 각종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이 불공정해 삼성물산 주주들이 피해를 봤다고도 지적했다. 합병 당시 이 회장은 제일모직 지분 23.2%를 보유했지만 삼성물산 지분은 없었다.

2심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 공소 사실을 입증하기에는 증거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중요한 범죄 사실과 사회적 파급효과 등을 고려할 때 추측에 의한 시나리오만으로는 형사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판시했다. 2심 재판부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혐의와 관련해서는 지배력 상실 회계처리 과정에 최소한의 합리성이 있다고 봤다.
이날 선고 직후 이재용 회장 측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재용 회장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법원을 빠져나갔다. 검찰이 상고해 재판이 3심으로 가도 결론이 바뀔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 회장은 공판 출석 부담도 던다. 이 회장은 1심 재판에서만 96회 공판에 직접 출석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법률심인 3심에선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공판 기일이 열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회장이 경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은 커스터마이징(맞춤화) 되고 있다. 엔비디아 이외의 고객사들과 만나 고객 다변화 물꼬를 트는 게 중요하다”며 “이 회장이 그간 재계 인사로서 쌓아온 경험과 인맥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AI(인공지능) 반도체에는 파운드리가 필요하다. 빅테크와 긴밀하게 협력해 사업 수주를 따내는 것이 삼성전자 입장에선 급선무”라고 말했다.

이재용 회장이 ‘뉴 삼성’의 ‘비전’을 내놓을지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이 회장은 2022년 10월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이 회장은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모셔오고 양성해야 한다. 세상에 없는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3년간 이 회장은 신년사도 내지 않았다. 지난해 ‘삼성 위기론’이 불거질 때도 이렇다 할 이 회장의 메시지는 없었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이재용 회장의 비전 제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삼성전자 한 직원은 “지금의 삼성은 도전적인 자세와 혁신이 많이 부족하다”며 “회사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해 줘야 임직원들이 그 노를 잘 저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오너 중심 경영의 강점은 비전 제시와 대규모 투자 등에의 빠른 의사 결정”이라며 “삼성의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휘말린 사이 삼성의 글로벌 경쟁력은 약화됐다. 무엇보다 주력인 반도체 사업에서 힘을 못 쓰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사업에서 삼성전자는 경쟁사인 SK하이닉스에 HBM 주도권을 내줬다. HBM 후발주자인 삼성전자는 미국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HBM 사양을 못 맞추면서 납품이 지연되고 있다. 또 다른 주력 사업인 스마트폰 사업에서는 애플은 물론 중국 업체들과의 경쟁이 심화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이 뉴 삼성 비전을 실현할 방법으로 과감한 투자 카드를 꺼낼지 주목받는다.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난 뒤의 행보가 그랬다. 이건희 회장은 1997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2009년 12월 삼성 비자금 사건에 대해 두 차례 사면을 받았다. 1987년 회장직에 오른 이건희 회장은 두 사건에서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구속되지는 않았다. 다만 사면 이후 이건희 회장은 회사의 비전을 세우며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이건희 회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2008년 7월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가 두 번째 사면 이후인 2010년 3월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같은 해 5월 이건희 회장은 태양전지, 자동차용전지, LED(발광다이오드),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분야를 5대 신수종 사업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까지 23조 3000억 원을 쏟겠다는 대규모 투자안도 내놨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다른 글로벌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투자해서 기회를 선점하라”고 주문했다. 이 같은 투자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출범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이재용 회장이 등기이사직에 선임될지도 재계 관심사다. 오는 3월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직에 선임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삼성전자 법인등기부에 따르면 현재 삼성전자 사내이사는 한종희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 부문 부회장, 노태문 모바일경험(MX) 사업부 사장,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 사장 등 3명이다. 노태문 사장과 이정배 사장의 임기는 3월에 만료된다. 앞서 이 회장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 중이던 2019년 10월 삼성전자 등기이사에서 사임했다. 현재 4대 그룹 총수 중 유일하게 미등기 임원이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