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계 스포츠 종목에서 쇼트트랙은 언제나 대한민국의 '효자종목'으로 불렸다. 마치 화수분처럼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가 빙판을 떠나면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이번 하얼빈 아시안게임에서는 기존 스타플레이어가 관록을 자랑하면서도 종합 대회에서 첫선을 보이는 선수들도 좋은 성적을 내며 1년 앞으로 다가온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의 전망을 밝게 했다. 총 9개의 금메달이 걸린 쇼트트랙 종목에서 한국이 따낸 금메달은 6개다. 동계아시안게임 역사상 최대 성과와 동률을 이뤘다. 김동성과 안현수가 각각 맹활약을 펼친 1999년(강원)과 2003년(아오모리) 대회에서 대표팀은 금메달 6개씩을 획득한 바 있다.
메달 색이 결정되는 첫날인 대회 이틀 차(8일)부터 쇼트트랙 선수단은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혼성 2000m 계주에서 금맥을 캤다. 이번 대회 대한민국 선수단의 첫 금메달이기도 했다.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12명 중 8명이 메달을 함께 목에 걸어 의미를 더했다. 혼성 계주 종목은 한 경기에 남녀 각각 2명씩 출전한다. 대표팀은 예선전부터 세미파이널, 결승에 이르기까지 선수들을 고루 기용하며 정상에 올랐다.
첫 결승전부터 기세를 올린 대표팀은 연이어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대표팀 간판 최민정이 여자 500m와 1000m에서 금메달을 더하며 3관왕에 올랐다. 500m에서는 김길리와 이소연이 나란히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며 모든 메달을 휩쓸었다. '신성'으로 기대를 모았던 김길리는 1500m를 석권했다.
남자 선수들도 여자 선수들 못지않은 활약을 선보였다. 유력 금메달리스트로 기대를 받던 박지원이 1500m에서 금메달, 500m와 10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장성우는 1000m 금메달, 500m와 10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모든 개인종목에서 시상대에 올랐다.
선수단이 고루 활약한 대표팀이지만 남녀 계주에서는 각각 3위 이내에 들지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세계 최강 여자 대표팀은 마지막 바퀴에서 중국과 충돌하며 4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어 열린 남자 대표팀의 결승전에서도 '사고'가 있었다. 마지막 주자 박지원은 카자흐스탄에 이어 2위에 오른 듯했으나 레이스 막판 중국과의 충돌 장면이 심판진의 비디오 판독 결과 실격으로 처리됐다.
한국 남자 선수들이 실격을 당한 장면에서 충돌한 이는 다름 아닌 귀화 선수 린샤오쥔(임효준)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독주하던 개인 종목에서도 단 하나의 금메달(남자 500m)을 낚아 챈 인물 역시 그였다. 과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으로서 여전히 출중한 기량을 자랑했다. 유니폼 색깔은 다르지만 한국 선수들은 린샤오쥔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쇼트트랙 외 또 다른 '메달밭'으로 불리는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도 성과가 적지 않았다. 여자 500m 월드컵 랭킹 1위 경력으로 '빙속 여제'라는 별칭이 붙은 김민선은 예상대로 본인의 주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대관식'을 치렀다. 김민지, 이나현과 조를 이뤄 팀 스프린트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획득, 대회 2관왕에 올랐다. 이에 더해 100m 이나현이 1위, 김민선이 2위에 차지해 500m와 메달 색을 서로 바꿨다.
남자 500m(김준호), 남자 팀 스프린트(김준호, 차민규, 조상혁), 남자 1000m(차민규), 여자 1000m(이나현), 여자 팀 추월(김윤지, 박지우, 정유나) 등에서도 메달이 쏟아졌다. 박상언, 정재원과 함께 남자 팀 추월에서 은메달을 딴 이승훈은 개인 통산 9개째 동계 아시안게임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는 이규혁(스피드 스케이팅), 김동성(쇼트트랙)을 넘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쇼트트랙과 스피드 스케이팅 등 빙상종목은 대한민국 선수단이 장기간 일정 이상의 성과를 꾸준히 내왔던 종목이다. 하지만 설상종목은 사정이 다르다. 평창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 '배추보이' 이상호와 같은 '아웃라이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제 무대에서 성적이 두드러진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 대회에서는 스키·스노보드 종목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6개가 나오며 향후 전망을 밝혔다.
첫 메달 소식을 전한 이는 프리스타일 스키 하프파이프 종목의 이승훈과 문희성이었다. 이들은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내며 시상대에 나란히 섰다. 장유진도 여자부에서 3위에 올랐다. 이승훈의 성과는 한국 최초의 아시안게임 프리스타일 스키 금메달이었다. 세계랭킹 6위를 기록 중인 그는 이번 대회 다크호스로 꼽히는 주자였다. 3차시기에 걸친 연기를 모두 안정적으로 해내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2005년생 20세인 그는 이번 금메달 획득으로 향후 선수생활에도 탄력을 받게 됐다.
당초 설상종목에서 가장 유력한 메달리스트 후보로 꼽히던 인물은 스노보드의 이채운이었다. 202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 경력이 있는 그는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금메달 1순위로 평가됐다.
하지만 금메달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계획에 없던 슬로프스타일에도 대회 직전 참가를 결정했고 탁월한 기술로 금메달을 따냈다.
반면 주종목에서는 불운이 따랐다. 대회 현지 날씨 사정으로 예선 성적이 그대로 최종 순위로 결정됐다. 결선에서 '진가'를 발휘하려던 이채운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예선 1위에 올랐던 2008년생으로 16세에 불과한 김건희가 금메달을 가져갔다.
바이애슬론에서는 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산이 쾌거를 올렸다.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평가 받는 일부 종목들은 앞다퉈 '귀화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귀화가 아니더라도 혼혈 선수의 국적 회복이나 '교포 선수 모시기'가 이어졌다. 크로스컨트리와 사격이 접목된 종목이기에 세밀한 장비 관리와 체계적 훈련 등이 필요한 바이애슬론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귀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4명의 러시아 출신 귀화 선수가 합류한 바이애슬론 대표팀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으나 메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후 일부 귀화 선수들이 세계선수권 등에서 메달을 따기도 했으나 많은 눈이 쏠린 올림픽 등에서는 성과가 적었다. 바이애슬론 대표팀에는 유독 많은 귀화 선수들이 한국을 떠나지 않고 남았다. 평창 대회 당시 약 20명의 귀화 선수가 활약 했으나 4년 뒤 올림픽에서 남은 이는 단 3명뿐이었다. 그중 티모페이 랍신, 예카테리나 아바쿠모바가 바이애슬론 대표팀 소속이었다. 이들은 국제 대회가 없는 시기에도 국내 실업팀 소속으로 커리어를 이어갔다.
예카테리나는 이번 대회에서 귀화 이후 약 9년 만에 바이애슬론 스프린트 7.5k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귀화 정책이 처음으로 국제종합대회에서 얻어낸 쾌거였다.
성과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귀화 선수 합류 당시 기존 국내 선수들은 "러시아 출신 선수들을 보며 배우는 점도 많다"는 말을 전한 바 있다. 이들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예카테리나와 함께 일본 출신 아베마리야, 고은정, 정주미가 팀을 이뤄 여자 계주 4x6km 계주 종목에서도 은메달을 따냈다.
예카테리나의 활약은 국내 바이애슬론에서 새 역사를 썼다. 역대 최초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이자 최초의 멀티 메달리스트로 그의 이름이 남겨지게 됐다.

피겨 종목에서도 새로운 기록이 나왔다. 차준환과 김채연이 각각 남녀 싱글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사상 최초로 동반 금메달이 나온 것이다. 여자 싱글 금메달은 전 대회 최다빈에 이어 두 번째, 남자의 경우 차준환이 대한민국 최초 금메달이다.
주니어 시절부터 국제무대에서 숱한 성과를 내온 김채연과 차준환이지만 이번 대회 금메달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김채연은 국내에서 '2인자'로 불렸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도 선배 이해인, 후배 신지아에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대회에서도 유력 금메달 후보로 꼽히는 이는 세계 1위 사카모토 카오리였다.
김채연의 극적인 금메달은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점수(TES)에서의 선전이 배경에 자리했다. 프로그램점수(PCS)에서 68.49로 사카모토(71.95)에 다소 밀렸으나 기술점수에서 13점 이상의 격차를 벌리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또한 김채연은 의상 제작 전공자 출신인 어머니가 만든 옷을 입고 대회에 나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차준환의 금메달도 예상을 뛰어 넘는 성과였다. 당초 유력 금메달 주자는 일본의 카기야마 유마였다. 차준환이 5위에 오른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카기야마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차준환은 2024 사대륙 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냈으나 카키야마의 1위 등극을 지켜봤다. 불과 약 1개월 전 열린 2025 토리노 동계 세계대학경기대회에서도 그에 밀려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이번 하얼빈에서는 순위가 뒤집혔다. 김채연과 마찬가지로 프리스케이팅에서 점수를 뒤집었다. 11일에 열린 쇼트 프로그램에서 94.09점으로 100점을 넘긴 카기야마에 이어 2위에 올랐다. 하지만 프리 스케이팅에서 187.60점을 획득, 168.95점의 카기야마를 크게 따돌리며 대한민국에 역사상 첫 남자 싱글 금메달을 안겼다.
대회 최종일인 14일 남자 아이스하키에서 동메달, 컬링에서 여자팀이 금메달, 남자팀이 은메달을 추가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선수단은 이번 대회 금메달 16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14개로 대회 종합 2위에 올랐다. 1위는 개최국 중국이었다. 종합 3위 일본은 2017년 삿포로 대회에서는 1위에 올랐으나 이번엔 양국이 자리를 바꾸게 됐다. 중국은 2007년 창춘 대회 이후 18년 만의 1위 탈환이다. 개최국이 등장하지 않고 코로나19가 유행하는 등 불규칙적으로 대회가 열려 혼란을 겪은 동계아시안게임은 이번엔 4년 뒤 재회를 기약했다. 다음 대회는 2029년,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에서 열릴 예정이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