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지난해 약속한 1조 원 사회환원이 어떻게 지켜질지 정 회장의 2심 선고를 앞두고 관심이 쏠리고 있다. | ||
지난해 현대차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아온 정몽구 회장은 지난 2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뒤 2심이 진행 중이다. 법정구속은 면했지만 2심 재판부가 ‘1조 원 마련 방안 제시’를 양형 조건 중 하나로 내걸었다. 지난해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나서 대국민사과 성명을 통해 1조 원 무상출연을 약속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방안을 내놓지 못해온 현대차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현대차의 ‘1조 원 마련 방안’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글로비스다. 지난해 비자금 사건이 터지고 나서 현대차는 대국민 사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글로비스 주식 전량(2250만 주, 지분율 60%)을 비롯한 현금 1조 원을 조건 없이 사회복지재단 등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글로비스 주가는 4만 원을 웃돌고 있었다. 정몽구 회장 부자의 보유 지분이면 주가 4만 4000원대에 접어들 때 1조 원을 맞출 수 있다.
글로비스 주가와 관련해 정 회장과 현대차 관계자들은 한동안 가슴을 쓸어내렸을 법하다. 현대차의 사회 환원 발표가 있던 날 글로비스 주가는 전날 4만 1750원에서 6250원 빠진 3만 5500원으로 급락했으며 이후 가파른 하강곡선을 그렸다. 지난 1월 23일 2만 1500원까지 떨어졌는데 이 때 기준으로 정 회장 부자 지분 가치를 환산하면 5000억 원에도 못 미친다. 1조 원을 만들려면 5000억 원 이상을 추가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지금껏 현대차가 재판부에 1조 원 마련과 관련한 별다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후 반등하기 시작한 글로비스 주가는 5월 둘째 주부터 급등세를 타며 5월 17일 현재 3만 7400원을 기록하고 있다. 정 회장 부자 지분가치가 5000억 원도 안 되던 수준에서 8400억 원대에 이른 것이다. 지금의 상승세라면 1조 원 가치에 이르는 4만 4000원대 입성도 조만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증권가에선 글로비스 주가 반등 요인을 최근 기아차 유럽공장 가동 등으로 글로비스의 물량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 회장 측이 5월 22일 공판에 맞춰 1조 원 마련 방안을 제시할 것이란 기대감 역시 글로비스 주가를 부풀린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정 회장 부자의 글로비스 지분 가치가 1조 원에 이른다고 덥석 글로비스 지분 전체를 내놓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글로비스가 지닌 현대차 계열사 지분율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글로비스에 대한 지배력 상실을 정 회장 부자가 탐탁지 않게 여길 수 있는 까닭에서다. 글로비스는 현재 계열사 엠코 지분(24.96%)과 현대오토넷 지분(6.73%) 등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오토넷은 폰터스맵과 만도맵앤소프트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모두 경영참여 목적의 지분 보유다.
글로비스는 현대차 계열사들의 물량 지원으로 인해 단기간에 급성장한 기업이다. 이 지분의 평가액이 늘어날수록 주요 계열사 지분율이 부족한 정의선 사장의 안정적 승계를 위한 실탄으로 쓰일 수 있다.
이에 대해 정부가 현대차를 압박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기아차가 지난해 영업손실 1253억 원을 기록하는 등 경영위기를 맞이한 상태에서 정부는 현대차그룹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차그룹과 협력업체들 전체에 종사하는 인력이 2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까닭에서다. 현대차가 ‘완납’이 아닌 ‘분납’으로 사회환원을 진행하더라도 절차에 문제만 없다면 굳이 글로비스 지분 전량 처분이 아니더라도 재판부 또한 발목을 잡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사회환원의 ‘분납’ 가능성을 높게 보는 재계 인사들 사이에선 정 회장 부자의 글로비스 지분 전체가 아닌 일부와 정 회장의 별도 사재 출연이 고려된다. 주가 상승세에 놓인 글로비스 지분 중 일부만을 먼저 내놓고 이후 정 회장이 지닌 현대차 계열사 지분 중 일부를 순차적으로 환원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최근 현대차 계열사의 주가가 힘을 쓰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5월 11일 종가기준으로 정몽구 회장의 주식 평가액은 2조 776억 원으로 여전히 2조 원 이상의 주식 재산가로 군림하고 있다.
여기에 현대차 주도의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해 정 회장 사재를 증여하는 것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만약 현대차가 만든 공공재단이 현대차 영향력 하에 놓일 수 있다면 사회환원 명분을 채우는 동시에 증여세 없이 지분을 넘겨주면서 해당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사례는 지난해 여러 재벌그룹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지난해 10월 별세한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 명의 삼성생명 지분이 삼성생명공익재단에 기부된 것,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어머니인 강태영 씨가 자신 명의 (주)한화 지분 전량을 천안북일학원에 증여한 것,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선친인 고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이 지난해 11월 별세하기 전 자신 명의 지분을 재단법인 영문에 기부한 것, 지난해 11월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별세하면서 고 조 전 회장 명의 지분으로 재단법인 양현이 설립된 것 등이 대표적이다.
2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어차피 이번 재판은 대법원까지 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이 무죄를 선고받을 경우 검찰이 항소할 것이 분명하며 정 회장이 유죄를 선고받을 경우에도 역시 항소 수순을 밟을 것이 뻔하다. 이번 재판의 끝을 현 정권 임기 안에 보기는 어려운 셈이다. 금전적 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서 완납이 아닌 분납카드를 꺼낸 뒤 조금씩 사회출연을 하면서 내년 2월 새 정부 출범시기에 맞춘 대규모 특사를 기대해볼 수도 있다. 회삿돈 횡령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던 두산 박용성-박용만 총수일가를 비롯한 경제인들이 올 초 버젓이 사면을 받은 점을 정 회장과 현대차 측이 떠올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