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영이 제일 처음 등장할 때 저는 민이 뿐 아니라 관객 분들이 보시기에도 불쾌감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떨 때 가장 불쾌할까 고민하다가 내가 우리 집에 들어갔는데, 내가 모르는 다 큰 애가 벗고 있으면 그럴 것 같더라고요(웃음). 민의 방에서 해영이가 입고 있는 속옷은 제가 준비한 건데요,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속옷을 가져가서 감독님께 ‘이걸 입고 하면 안 될까요?’하고 여쭤봤죠. 감독님이 ‘갑자기?’ 하고 놀라시더라고요(웃음).”
이설은 해영에 대해 ‘사랑 받고 싶어서 미친 아이’ 로 정의했다. 그 말대로 해영은 사랑을 받고 싶어서 처음부터 당연히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군다.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자신을 떠밀어내는 민에게 몇 번이고 내쳐지면서도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강아지마냥 치대기도 하고, 임신한 민에게 협박과 폭력을 일삼던 전 남자친구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달려들어 기어코 민을 구해내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뚝심(?)에 결국 민도 마음의 빗장을 풀어내고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어느 정도 해영의 ‘침범’을 허용하게 된다.

‘침범’ 속 해영과 민은 밝음과 어둠이라는 명도의 차이만 있을 뿐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모습을 보인다. 가족과 떨어져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힘들었을 것이라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명확하게는 알 수 없는 과거 행적을 가졌다. 자식을 포기하려 한 부모를 향해 깊은 어둠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까지 닮아있는 이 둘을 두고 관객들은 과연 어느 쪽이 ‘20년 후의 소현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2부의 포커스가 민에게 고스란히 맞춰지는 만큼, 자연스럽게 그가 성장한 소현일 것이라 예상한 관객들이 많았을 터다. 그런 이들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드는 반전은 이 작품 속 각 캐릭터들을 연기한 배우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는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도 엄청나게 놀랐어요! 시나리오를 볼 땐 당연히 민이가 소현일 것이란 확신이 있었고, 해영은 그에게 필적할 만한 또 다른 상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저한테도 진짜 반전이었던 거죠. 너무 재미있어서 속으로 ‘이 작품 꼭 하고 싶다!’ 그랬어요(웃음). 사실 영화를 보시며 관객 분들도 저처럼 이 반전에 놀라주셨으면 했는데 이미 예고편을 보시고 눈치 채신 분들도 꽤 있으시더라고요(웃음).”

“사람은 가끔 소유욕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아마 해영이는 어릴 적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날 무서워하고, 나를 향한 분노와 증오를 가지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껴왔을 거예요. 거기서부터 비뚤어진 소유욕과 사랑, 증오가 들끓어 오르면서 이렇게 폭주기관차가 된 거죠. 엄마에게 살해당할 뻔 했던 것도, 민에게 내쳐진 것도 아마 해영이 이렇게까지 치닫는 것의 연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폭탄이 폭발할 때 필요한 화약처럼 사랑에 대한 갈증이 그런 역할을 해준 거죠.”
그렇게도 침범하고 싶었던 민과의 격렬한 몸싸움 끝에 완전히 ‘밀려나버린’ 해영은 20년 전 세상을 떠난 엄마와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 그가 가장 목말라 했던 엄마의 애정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함께 떠날 것을 약속하지만, 끝내 그것이 자신이 원했던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정말 모질게도 밀어낸다. “나랑 엄마는 못 가겠네요, 천국에” 7살의 소현이 했던 말을 비틀어 “지옥은 엄마나 가”라며 차가운 분노를 쏟아낸 해영을 되새기면서 이설은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영화 ‘침범’을 본 관객들이 이설이라는 배우에게 속절없이 빠지게 되는 것처럼 이설 역시 ‘침범’ 속 해영에게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처음이었다”는 그에게 있어 데뷔 7년 만에 만나게 된 이 작품은 어쩌면 배우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어 보인다. 배우가 왜 배우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품을 만날 수 있다니, ‘배우 이설’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없을 터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이 작품을 엄청나게 하고 싶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진짜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그즈음 이 일을 계속해도 되나 라는 생각을 한참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침범’을 만나고 ‘여기서 하얗게 불태우면 정말 후회가 없겠구나’라며 뛰어든 거죠. 이 작품을 하면서 제가 정말로 이 일을 좋아한다는 것, 그래서 쉽게 포기할 수 없겠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별로 없었는데 제가 배우라는 직업을 정말 사랑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믿게 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어떤 작품에 나오더라도 사람들이 ‘얘가 나오네? 그럼 봐야지’라고 말하는 그런 배우로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