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4월 9일 권노갑 민주당 전 최고위원(가운데) 사무실을 찾은 한화갑 최고위원(왼쪽)과 김옥두 전 사무총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DJ와 YS. 영호남을 대표하는 두 거물의 출현은 한국 정치사의 ‘빅뱅’이었다. 두 보스는 반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가치를 공유하며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 앞에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두 보스 모두 자신만의 독자적 계파를 형성했다. 그것이 바로 두 보스의 자택을 빗대 명명된 DJ의 ‘동교동계’와 YS의 ‘상도동계’다.
먼저 동교동계의 시초부터 살펴보자면 정확히 반세기 전인 1962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DJ는 1961년 강원도 양구에서 민의원으로 당선됐지만, 쿠데타가 발발해 국회가 해산됨에 따라 다시금 정치 백수 신세가 됐다. 당시 DJ가 서울로 상경해 자리 잡은 곳이 지금의 동교동 자택이다. DJ 정치인생 초창기, 이곳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비서진을 구축했던 1세대 동교동 라인이 이때부터 형성된다.
상도동계 출신인 민주당 김영춘 부산공동선대위원장은 “내가 상도동계 출신이지만 보스에 대한 충성도는 분명 동교동계가 앞선다. 그 점은 나도 인정한다. 호남을 중심으로 박해받고 힘든 정치를 한 사람들이다. 그 점은 상도동계와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의 말대로 동교동계는 DJ와 정치적 혈연관계를 형성하며 때론 죽음도 불사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 뒤를 이어 1984년 민주연합청년동지회(이하 민추협) 형성 이후를 기점으로 동교동 2세대가 시작된다. 이 당시 DJ와 연을 맺은 대표적 인물들은 남궁진, 최재승, 설훈, 윤철상, 문희상, 배기선 등이다. 남궁진, 최재승 전 의원은 직접 민추협 기획위원으로 참여하며 DJ와 연을 맺었으며 윤철상 전 의원은 민추협 결성 후 DJ의 비서로 발탁됐다. 현직인 설훈 의원은 1980년 DJ내란음모사건 당시 군사법정에서 DJ와 함께 서며 연을 맺었다.
이 밖에도 1~2세대에 걸쳐 합류한 범 동교동계 인사들이 존재한다. 동교동 직계는 아니지만, DJ와의 인연 속에서 주류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들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한광옥, 김경재, 박지원이다. 1세대와 연배는 비슷하지만 비교적 비서 라인에 늦게 합류한 한광옥 전 의원은 DJP연합의 1등 공신으로 훗날 당 대표와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DJ의 미국 망명 시절, DJ를 후원했던 미주파 김경재 전 의원, 박지원 의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DJ 사람이다. 특히 박지원 의원은 ‘DJ의 유서 집행자’로 일컬어질 만큼 마지막까지 DJ와 깊게 마음을 나눈 인물이다.
동교동계 내에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 줄기가 존재한다. 바로 ‘구파’라 일컬어지는 권노갑계와 ‘신파’로 일컬어지는 한화갑계다. 1~2세대를 통틀어 동교동계 인사들은 대개 이 두 파벌로 나뉜다. 이 두 파벌은 오랫동안 동교동계와 호남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여왔다.
좌장인 권노갑 고문을 필두로 형성된 구파에는 김옥두, 이윤수, 윤철상, 박지원 등이 속한다. 반면 한화갑 전 의원을 필두로 한 신파에는 김경재, 문희상, 설훈, 배기선과 훗날 구파에서 노선을 변경한 한광옥 등이 속한다. 동교동계 보좌진 출신인 한 정치권 인사는 “구파는 행동파들이었다. 오랫동안 DJ 곁을 지키면서 DJ의 말 한마디면 뭐든 행동으로 옮기는 충복들이었다. 반면 신파는 엘리트파들이다. 한화갑, 한광옥, 김경재 등 이른바 서울대 3인방은 물론 대부분 SKY(서울 연세 고려대) 명문대 출신으로 행동보다는 지략과 논리로 DJ를 보좌한 인물들이다. 구파와는 분명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신파 출신인 김경재 전 의원 스스로 “우리는 DJ 말에 무조건 따르는 권노갑 계열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DJ가 명하면 뭐든 따랐지만, 우리는 DJ 면전에 할 소리는 다 했다”며 구파와의 선을 분명히 했다.
이 두 계파는 한배를 타며 협력과 경쟁을 반복했다. 1997년 대선 직전 권노갑, 한화갑을 비롯한 신·구 연합 동교동계 7인방이 청와대와 정부 임명직을 거부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공개적인 대립은 없었지만, DJ 집권을 계기로 본격적인 신·구파 갈라서기가 시작됐다. 당시 한화갑 전 의원은 ‘리틀DJ’라는 별명답게 차기 당권과 대권을 한 손에 쥐기 위해 권노갑 고문을 비롯한 구파와의 정면대결을 벌였다.
정권 초 한 전 의원은 구파가 대항마로 내세웠던 이인제 의원과의 당권 경쟁에서 승리하며 대표직에 올랐지만, 정권 말 치러진 두 번째 당대표 경선에서는 당시만 해도 구파와 노선을 함께한 한광옥 전 의원과의 대결에서 패배하며 고배를 마셨다. 사실상 이때부터 동교동계의 해체 현상이 본격화됐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교동계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한 때는 2002년 후단협 사태로 시작된 친노 그룹과의 싸움이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동교동계를 비롯한 구 민주계 인사의 물갈이와 그에 따른 친노 인사 배치가 본격화되면서 ‘동교동계’의 입김은 현실에서 점점 약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2004년 동교동계와 구 민주계 인사들이 한나라당과 합세해 발의한 대통령 탄핵소추, 그리고 당시 총선에서의 대거 낙선은 동교동계 해체를 가속화시켰다.
이에 비하면 YS의 상도동계 계보는 단출한 편이다. 상도동계 인물은 크게 1세대와 2세대 두 부류로 나뉜다. 동교동계 1세대 일부가 아직 당 고문직이나마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상도동계 1세대들 대부분은 운명하거나 지병으로 인해 중앙 정치 무대에서 사라진 상태다. 상도동계가 본격 형성되던 시기는 YS가 처음 대권 도전을 꿈꾸던 1971년 전후다.
이 당시 주축 멤버가 ‘좌동영, 우형우’로 불리던 김동영, 최형우 그리고 서석재, 김덕룡이다. 특히 YS가 가장 사랑했던 심복은 김동영 전 의원. 그는 YS를 실제 대통령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92년 대선을 앞두고 특유의 완력으로 당내 군부 및 노태우 지지 세력들을 직접 제어해 나간 인물이다. 당시 그는 전립선암을 앓다 결국 대선을 코앞에 두고 91년 여름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기 1년 전 당시 서동권 안기부장과의 술자리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박지원 비서실장. 청와대사진기자단 |
최형우 전 의원 역시 ‘상도동 돌쇠’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YS 특유의 저돌적인 정치 행보에 힘을 보탠 인물이다. 한때 그는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1997년 뇌졸중을 앓다 정계를 떠났다. YS의 최대 사조직인 민주산악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로 유명하다. 서석재 전 의원 역시 상도동계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64㎝의 단신인 서 전 의원은 평생 YS 지근거리를 지키며 김동영 전 의원 사후 상도동계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했었다. YS와 이회창의 사이가 벌어졌던 97년 대선 당시에는 YS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이인제 의원을 위해 탈당까지 감행하며 이회창 낙선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지난 2009년 작고했다.
이와 함께 상도동 1세대 막내 격인 ‘DR’ 김덕룡 민화협 의장이 있다. 상도동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문 이니셜이 붙는 인물이다. 국내 정치계에서 이니셜이 붙는 경우는 알다시피 거물급 인사들뿐이다. 대체적으로 저돌적이었던 상도동계 인사들과 달리 지략과 논리력이 뛰어나 YS에 의해 중용됐다. YS의 신민당 총재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상도동계 실권을 장악했다. YS와 반독재 투쟁을 함께했을 당시 그는 수차례에 걸쳐 옥살이를 자처했다. 이때마다 그의 부인은 아이들에게 “아빠는 지금 해외출장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김 의장은 아이들을 속이기 위해 출소 후 항상 장난감을 사 들고 갔다고 한다. 그가 YS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때, 비서진을 이뤘던 인물이 최기선, 문정수, 심완구 등 이번에 그와 함께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에 동참했던 이들이다.
그 밖에도 김 의장의 비서 라인에 있었던 인물이 상도동계 직계라인 막내 격인 민주당 김영춘 부산 공동선대위원장이다.
1세대가 YS의 직계 비서 라인이라면 84년 민추협 이후 영입된 2세대 상도동계 인물들로는 서청원, 김무성, 이규택 등이 있다. 이들의 특징이라 하면 YS에 의해 발탁됐지만, YS와의 인연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규택 전 의원은 3당 합당 당시 YS를 규탄하며 상도동계를 떠났고 서청원 전 의원은 YS와는 온도 차가 상당했던 이회창 당시 총재 라인에 서며 사실상 YS와 거리 두기를 시작했다. 김무성 의원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이에 대해 앞서의 김영춘 위원장은 “1세대 상도동계와 외부 영입의 성격이 강한 2세대 상도동계의 온도 차는 내부에서도 무척 심했다. 이는 YS 스스로 느끼는 거리감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 1995년 10월 20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최형우 의원(왼쪽)과 김덕룡 의원이 말을 나누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2001년 8월 16일 고 김동영 전 정무장관 1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김영삼 전 대통령.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어떤 권력이든 영원할 수는 없다. 이제 두 계파의 조직 자체는 거의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J와 YS에 의해 발탁된 몇몇 계파 출신 인물과 일부 훈수 세력만 존재할 뿐 현실정치에서 이제 두 계파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난 반세기 한국 정치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두 계파의 정치적 유산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화’라는 선물을 남겼지만, 여전히 깨지지 않는 ‘동서 지역구도’와 ‘패거리 정치’라는 사생아도 남겼다. 조직은 무너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국내 정치계를 맴돌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여야 대선후보에 대해 엇갈린 지지를 하며 언론의 반짝 주목을 받았지만, 국민들은 그것을 ‘양김시대의 종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올드보이들 노욕인가 소신인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올드 멤버들이 이번 대선을 앞두고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 두 계파 인사들이 잇단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통해 ‘이합집산’을 단행하면서 이번 대선 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민주당 내 동교동계 인사들이다. 지난 10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캠프 초기부터 한광옥 전 의원과 김경재 전 의원이 각각 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의 수석부위원장과 기획특보의 직책을 받으며 입당했다. 지난 11월에는 동교동계 신파의 큰 축을 이루던 한화갑 전 의원까지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특징이라 하면 이들 대부분이 동교동계 내에서도 한화갑 계열의 신파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김경재 전 의원은 민주당과의 결별을 선언한 이유에 대해 “가장 큰 이유는 박지원 때문이다. 그는 DJ의 마지막을 갈무리했고 마지막까지 우리(신파)의 접근을 차단했다. 권노갑, 김옥두는 그것을 인정했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DJ도 말년에는 자기 말에 순종하는 그들에 막혀 제왕적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그들의 패거리 정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 이번 대선을 기점으로 문재인은 안 된다 싶었다. 국정운영이 전무한 그런 후보를 밀 수는 없었다”며 속내를 밝혔다.
지난 12월 10일 상도동계 좌장격인 김덕룡 민화협 의장의 문재인 지지 선언은 더 극적이다. 당시 김 의장과 함께 문정수, 최기선, 심완구 등 상도동계 직계 비서라인 출신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더군다나 김 의장은 MB 정부 탄생의 1등 공신인 6인회 출신이기도 했다. 문재인 후보와 김 의장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인사는 상도동계 직계 비서 라인 막내 격인 김영춘 부산 공동선대위원장이다. 그에 따르면 양측의 교감은 이미 지난 11월부터 있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김 의장은 오래전부터 박근혜 후보에 대한 노선차이와 문 후보에 대한 호감을 넌지시 내비쳤다. 특히 지난 11월, 김 의장은 자신의 측근을 통해 나에게 문 후보 지지 여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그리고 12월 초가 돼서야 문재인 후보와 직접 접촉했고 지지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번 대선,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올드 멤버들의 이합집산에 대한 배경은 현실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당 입장에서는 여전히 50대 이상 중장년층 유권자들에게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카드가 먹힐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번 대선은 이들이 훈수 격이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에 대해 김영춘 위원장은 “사실 그렇다. 20~30대 유권자들에게 이러한 양 계파 인사들의 영입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중장년층은 다르다. 여야 다 마찬가지로 중장년층 표심을 자극하기 위한 성격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번에 이합집산을 감행한 양 계파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지막 정치 행보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도 있다. 지난 2006년 부인의 공천 비리 연루 의혹으로 당내 입지가 급격히 줄어든 김덕룡 의장의 경우 MB정부 만들기에 올인했지만 그와는 상극인 박근혜 후보 진영에서 포지션을 잡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건 새누리당에 합류한 동교동계 신파 인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김경재 전 의원은 “김덕룡은 MB와 너무 친하다 보니 자리 잡기가 힘들지 않았겠나. 민주당에 건너가, 자신의 텃밭인 익산에서 어떤 위치를 잡지 않겠나 싶다”면서 “나 역시 정권 창출 이후 남북관계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병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