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이 만난 그리스 청년들은 뛰어난 배경과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했음에도 제 역량을 발휘할 수단이 없다고 토로했다. 고향에 가족을 남겨둔 채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던 사연도 있었다. 특히 그리스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무슨 이유일까.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신타그마 광장부터 '인류 역사의 뿌리' 파르테논 신전까지 쭉 뻗어 향하는 길에는 여러 골목이 형성돼 있다. 11세기 세워진 '성 캐서린 정교회성당'과 19세기에 지어진 정교회대성당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들 주변으로는 초대형 상권이 형성돼 있다. 한국 명동을 연상하게 만드는 거리다.
명동 골목처럼 여기서도 느긋하게 걷기란 불가능하다. 전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과 그리스 젊은 청년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불편하다. 하지만 그리스 시민들은 이런 분위기를 지난 수년 동안 그리워했다. 그리스 정부가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후로 거의 10년 동안 이곳은 공실이 넘쳐나고 한적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30년 넘게 거주한 한인 소피아 조 씨는 이에 "참 감사한 일"이라며 "그리스는 유럽 특유의 낭만에다, 한국처럼 넘치는 활력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나라다. 그런데 경제 침체를 겪었을 땐 지금 같은 모습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나마 나아져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스는 2018년 구제금융 체제 졸업 후 신타그마 광장 일대까지는 활력을 되살려놓았다. 그러나 아직도 부활을 꿈꾸는 지역이 여럿이다. 여기서 10분쯤 걸으면 나오는 오모니아 광장이 대표적이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아테네대학 일부 캠퍼스 등과 가까워 한때는 청년들이 밀집해 여가를 즐긴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4월 8일(현지시각) 방문한 오모니아 광장 일대 골목에서 청년들 활기를 느끼긴 불가능했다. 오히려 세상에 비관적이고 불만 가득한 이들의 분노가 가득했다. 5성급 호텔 상점들은 대부분 공실이었다. 주위 벽면에는 온갖 낙서로 채워졌다. 노숙인들이 진을 치고, 마약을 투약한 듯 몽롱한 눈빛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도 보였다.
호텔도 많은 이 거리는 그리스 경제위기로 관광객들 발길이 끊긴 뒤 급속도로 슬럼화했다고 한다. 2012년 한국인이 칼에 찔린 사건도 있었다. 실제 그리스 여행객들의 온라인 후기 글을 보면, 잘 모르고 이곳에 숙소를 잡았다가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날은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과거에는 길에서 버젓이 마약을 하는 이들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비교적 나아진 편이라고 한다. 골목 한 가운데 '마약 대항 기구'가 있어 상담과 치료를 적극 도운 영향도 컸다. 다만 마약을 단숨에 끊기 힘든 만큼, 투약자들이 지금은 다른 어딘가로 옮겨 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관광업도 비수기 땐 강제로 일 쉬고…"

이날 일요신문과 만난 안토니스 히옥두리스(40대)는 경제위기가 한창이던 2010년 9월 20대 나이로 직장에서 예고 없이 해고됐다. 그는 원래 신문기자였다. 같은 회사 기자 30명이 단 하루 차이로 10명, 20명씩 실업자가 됐다. 경제위기 여파로 정부와 기업 등의 광고가 끊기면서, 회사는 일간지에서 주간지 체제로 바뀌었다.
함께 해고된 동기들 가운데 복직을 기대하는 쪽은 거의 없었다. 안토니스는 "지금 현실만 봐도 그리스에 남은 산업은 관광과 해운업뿐이지 않나"라며 "이마저 사업자들만 돈을 벌고, 노동자들은 척박한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게다가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관광업도 비수기가 되면서 직원들이 강제로 일을 쉬는 게 고착화됐다"고 부연했다.
그는 현재 그리스 통계청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8개월 계약직이다. 한국처럼 그리스도 금융위기 이후 속칭 '쪼개기 계약'이 관행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는 "부동산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이렇게 고용이 불안한 현실에서 그리스를 떠나는 이들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토니스는 정치권이 초래한 사회 불신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2009년 새로 집권한 사회당이 전임 정부인 신민당의 '재정적자 비율 조작' 사실을 폭로한 사례도 있었지만, 경제위기 이후 정부와 언론이 일제히 "우리 다 같이 버블경제를 즐기지 않았느냐"는 기조로 일관하며 문제 책임을 국민에 전가했다는 인상이 짙다.
안토니스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가 만성화됐고, 공무원 일부는 파견업체 소속으로 바뀌었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청년들은 '불합리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공감대를 이뤘다"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이 경우 정부를 향해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분노가 표출돼 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기자는 "여러 면에서 한국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안토니스는 "한국 관련 뉴스가 최근 워낙 많이 나와서 잘 살펴봤다"며 "그래도 한국은 대통령 비상계엄을 국회가 2시간 만에 해제한 저력이 있지 않나"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오르고스 아슬라디니스(30대)는 현재 네덜란드 한 기업에서 브랜드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 이날 모처럼 고향인 그리스로 휴가를 나왔다. 그는 원래 취업난을 잠시 피하고자 2013년 9월 석사 공부 목적으로 네덜란드로 갔는데, 이제는 그리스로 돌아가긴 힘들겠단 생각이 커졌다.
그는 "최근 그리스 경제 관련 지표가 꽤 건전하게 나오고 있지만, 지표와 현실은 결코 다르다"며 "임금에 비해 물가가 너무 비싼 편인데, 시민들의 소비로 거둔 부가가치세 등 세수가 시민사회에 제대로 배분되지 않는다는 인상이 든다"고 했다. 이어 "네덜란드는 그리스보다 체감상 20% 정도는 적은 것 같다"고 말했다.
오르고스도 정부와 정치권을 향한 불신이 크다. 그는 "정부기관이든 기업이든 신입직원을 채용할 때 실력보단 다른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게 다수가 공유하는 생각"이라며 "물가가 너무 높아 일상생활까지도 위협받는 현실인데, 정부가 이를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런 환경에서는 결혼도 출산도 힘들다"고 했다.
오르고스는 해외에 나간 지인들 중 그리스로 돌아올 생각이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고 전했다. 그리스 복귀를 계획하는 소수의 사례는 대부분 현실적 문제보단, 인간관계나 향수병 같은 감성적 요인들이라고 설명했다. 이마저 대부분 나이가 든 채 귀국하므로, 그리스 정부 기대처럼 산업 중추 역할을 하긴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리스의 이 같은 현실은 한국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정경유착과 채용 불공정, 기업의 청년 노동 착취 등 한국사회 청년 담론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는 언어 구조가 영어와 비슷해 대부분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아 해외 진출이 비교적 용이하단 분석도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그리스보다 산업 분야가 다양해 질 좋은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더 존재한다는 희망이 남아 있다.
그리스=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