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보통 사람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 재정적 뒷받침은 간과한 채 선거용이나 선심성 포퓰리즘 공약과 정책을 남발해 극심한 홍역을 앓았거나 지금도 앓고 있는 나라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 역시 포퓰리즘 논쟁이 뜨겁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으로 대한민국은 '다시 만난 세계'와 마주했다. 예기치 않게 돌입한 대선 국면에 희망과 우려가 교차한다. 10년도 채 되지 않아 벌써 두 번째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은 만큼 다음 대선은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이 여느 때보다 중요한 과제가 됐다.
'인기 영합주의' 유혹은 걸러야 한다. 일요신문은 그 폐해와 속살을 현지에서 들여다봤다. 우선 포퓰리즘 때문에 국가부도를 맞았다고 알려진 그리스로 향했다. 현지에선 포퓰리즘도 원인이었는데,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진단도 많았다. 관광업 등 기존 핵심 산업에 의존해 신산업 투자가 부족했고, 정치권 무능과 부패도 큰 문제로 꼽혔다.

'관광대국' 그리스는 2024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2만 432달러로 세계 52위에 속한 국가다. 인구가 한국(GDP 3만 6000달러)의 5분의 1가량인 1004만 명에 불과한 점에 견줘보면, 나름 경제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특히 2008년까지만 해도 그리스는 한국을 압도했다. 당시 그리스 GDP는 3만 2174달러, 한국은 2만 1340달러였다.
'신들의 나라'로 불리는 그리스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들이 버린 나라가 됐다. 공공부문 중심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부채에 옴짝달싹 못하며 '유럽 문제아'로 불리는 치욕을 견뎌야 했다. 결국 사실상 '국가부도'에 이르며 2010년 국제통화기금(IMF), 2012년 유럽연합(EU)에 손을 벌렸고, 2018년 구제금융 체제에서 졸업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한국 언론에선 그리스 정부의 '퍼주기 정책', 즉 포퓰리즘을 사태 원흉으로 단정해왔다. 하지만 현지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시각이다. 복잡한 사안을 "포퓰리즘 탓"으로 뭉뚱그려 단정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현지 전문가들은 2001년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스는 유로존 가입으로 기존에 써오던 통화를 드라크마에서 유로로 바꾸게 됐다. 2001년 '340.75드라크마=1유로' 비율로 유로화와 대체됐다. 교환 비율은 무려 '340.75 대 1'. 340드라크마짜리 물건이 1유로가 돼 버리니 물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기축통화'를 쓰게 됐으므로, 저금리 대출이 가능해졌다.
그리스는 쉽게 빌린 돈을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에 투자하기보다는 내부 문제 해결에 주로 썼다. 포퓰리즘 비판은 이 대목에서 나온다. 최저임금 확대와 함께 공무원 수를 크게 늘렸고 무상의료와 연금 확대 등에 지출을 집중했다. 공공부문 지출을 중심으로 부채를 쌓아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직격탄을 맞았다.

베따스 그리스 경제산업연구소(IOBE·Foundation for Economic & Industrial Research) 소장은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포퓰리즘 자체만 봐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IOBE는 그리스 중앙은행 총재도 배출한 유력 기관이다. 그는 "애초 그리스 잘못을 꼬집으며 경제 위기를 예상했던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베따스 소장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유럽에서 문제가 된 곳은 그리스뿐 아니라 스페인과 아일랜드 등 여러 국가가 있었다"며 "다만 그리스의 경우 기존 무역적자뿐 아니라, 관광업 등에 치중된 산업구조 속 노동생산성도 낮아 정부 재정 적자가 계속 늘어나는 악순환이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유로화 통용으로 물가가 폭등해 공공뿐 아니라 민간기업도 임금인상은 거스르기 힘든 분위기가 조성된 측면도 있었다"며 "한국이야 자체 통화를 쓰므로 인플레 등 문제 해결에 여러 정책적 시도가 가능하지만, 그리스는 유럽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사실상 통화주권이 없는 상태라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니콜라오스 교수는 "드라크마와 유로화 상호 가치를 애초에 잘못 판단했었다"며 "걷잡을 수 없는 물가인상으로 국민이 신음했다. 하지만 그리스 정부로선 유럽 공동체 일원이 된 만큼 서유럽 중심의 경제 체제를 따라가야 하다 보니 자체적인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다"고 바라봤다. 정치권 '무능'이 문제를 키웠단 의미다.
이 교수는 다만 "유로존 가입 후 정부의 공공부채가 고부가가치 산업 투자 대신 공무원 확대 등 중심으로 이뤄진 지점은 포퓰리즘으로 볼 수도 있다"며 "게다가 공공부문은 아직도 노동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지므로, 부패척결 등을 포함한 과감한 개혁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리스에선 포퓰리즘 외 정치권 부패가 문제를 키웠다고 본다. 애초 불황 전조는 읽히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2009년 10월 신민당을 몰아내고 집권한 사회당 게오르기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전임 정부가 15.4%인 재정적자 비율을 6%로 조작했다"고 폭로했다. 그리스가 경제 구제책을 만들 '골든타임'을 지난 때였다.
베따스 소장과 니콜라오스 교수는 그리스 경제가 아직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지 않았다. 경제위기를 계기로 떠난 그리스 청년 인재가 약 50만 명에 달하는 데다, 이들이 돌아올 기미마저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두 전문가는 "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청년 인재들이 앞장서 그리스를 떠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오히려 청년들이 돌아올 길은 더 멀어지고 있다. 그리스는 IMF 등이 요구한 고강도 긴축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고 있다. 무상의료 폐지와 연금 인하, 의료보험 혜택 대폭 축소 등이다. 정규직의 비정규직화까지 이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유로존에서 국가부채 비율은 최상위권, 1인당 GDP는 최하위권이다.
그나마 최저임금은 2019년 이후 꾸준히 올려 2024년 기준 830유로(약 120만 원)에 닿았다. 물가인상 등을 고려한 조치지만 치솟은 물가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2000~2008년 독일 물가가 16% 오르는 동안 그리스는 32%나 급증했다. 같은 기간 독일은 주택 가격이 13% 떨어졌지만, 그리스는 53% 올랐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미헬라가기스 피레우스국립대 경제학 교수는 "그리스가 물가 대비 임금이 너무 낮은 건 사실이고, 구제금융 이후 노동자들은 교섭권마저 잃어 당분간은 삶이 쉽지 않을 듯하다"며 "그리스 자체 통화 정책도 불가능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등 외부 변수도 커 국민들이 언제까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지 예측이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이 교수는 우선 그리스 산업구조의 체질부터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그리스는 관광업과 해운업이 전체 산업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며 "이런 특성 탓에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금융위기 때만큼 경제 피해가 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배경 때문에 지금도 정부가 부채를 상환하는 속도가 매우 늦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리스가 향후 얼마나 다양한 산업을 키워낼지에 미래가 달렸다고 전망했다. 문제는 국제 사회가 경쟁 중인 전기차 배터리나 인공지능(AI) 등 산업 관련 논의가 그리스에선 이제 시작 단계란 점이다. 이 경우 인재 유치가 매우 중요한데, 많은 청년이 해외로 떠난 상황이다. 그리스 청년 실질실업률도 19~24%, 한국의 두 배로 추산된다.
미헬라가기스 교수는 "불행히도 해외로 나간 청년들이 돌아오려면, 그들이 속한 나라의 경제가 나빠지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면서도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 있던 그리스 청년들이 그나마 조금 돌아온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점들을 고려해 그리스 정부는 과감한 긴축은 시행하되 완화책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지난 3월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인 'Baa3'으로 상향했지만 아직도 낮은 임금을 숙제로 지적했다. 그리스는 유로존 가입 후 임금을 올렸음에도 유럽에선 저임금 시장에 속해 투기자본이 대거 유입됐다. 그리스 금융기관 채무와 부동산 가격이 동시 폭등했고, 이는 구제금융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리스의 저임금 실태는 OECD 통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7년부터 2022년 사이 한국은 실질 임금이 20% 이상 증가한 반면, 그리스는 30% 넘게 감소했다. 이 기간 그리스처럼 실질 임금이 감소한 곳은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뿐이다. 전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경제 취약점이 부각된 곳이다. 그리스는 그중에서도 유독 심하다.
그리스의 이 같은 현실은 한번 망가진 경제는 회복 때까지 엄청난 고통을 지속적으로 안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청년 인재들의 이탈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등이 관행으로 자리 잡는 순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정부 부채비율 관리와 첨단산업 다각화 및 투자 등이 중요한 이유다.
특히 그리스는 한국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주목된다. 역사적으로는 그리스도 1960년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을 시민 힘으로 몰아낸 경험이 있다. 경제적으로는 그리스가 유럽에서 근로시간이 가장 긴 나라다. 연간 근로시간이 1886시간으로 한국(1901시간)보다는 짧지만 차이는 15시간으로 크지 않다.
이 밖에 OECD 통계에서 자영업자 비율도 그리스가 1위, 한국이 5위로 상위권이다. 고용안정성과 노후자산이 미흡한 영향이다. 정치적으로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2023~2024년 조사 결과에서 정부 불신도가 그리스 1위, 한국 5위로 상위권을 차지했다. 사법체계 불신은 한국과 그리스가 나란히 1, 2위를 기록했다.
그리스=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