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 선생의 ‘천국의 신화’의 꽃은 역시 장장 29권을 할애하고 있는 단군이야기다. 선생의 단군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민심을 품는 힘이 무엇인지 보인다. 단군의 힘은 민심을 품는 힘이고, 그 힘은 고통스런 운명의 바람 앞에서 징징거리지 않고 그 바람을 마주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단군, 아버지가 신의 아들 환웅이고, 어머니가 웅심국의 공주다. 그는 거룩한 땅 신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면 뭐 할까? 호녀에게 죽은 엄마는 기억 속에도 없고, 그의 엄청난 신분이 그에게 준 것은 도망자의 삶인데. 자기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은 늘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했고, 그러고 나서도 스스로는 겨우 벌채노예가 되어 연명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찾아든 사랑은 또 들개 떼의 공격으로 죽었다.
스스로는 한 번도 왕이 되겠다고 의지를 낸 적도 없는데 그를 따르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어이 그를 도우려 한 신시의 노인의 말에 답이 있다.
“환웅 네 분을 섬기면서 무수한 전쟁을 치러왔지만, 이처럼 백성에게 물어보아가며 전쟁하는 분은 단군마마가 처음이오. 이렇게 싸우면 이길 수밖에 없어요.”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 백성을 존중하는 그의 태도다. 그로 인해 자꾸 자꾸 세력이 생긴다. 그런데 책임회피를 해본 적이 없으니 책임감도 커져간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앞에 펼쳐지는 생을 헤쳐가면서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책임전가를 하지 않는다. 그를 따르는 천민의 아들 까마귀가 그와 함께 쫓기다 세상을 떠났을 때 늘 소중한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게 되는 자신의 운명을 끝내야겠다며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이미 부모님을 잡아먹은 놈이다. 날 혈육처럼 키워준 유모와 길마 할아버지, 부사리 아재는 어찌 되었는가. 모두 나로 인하여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산판에서 나를 자식처럼 거두어준 까귀 아저씨, 내가 목숨보다 사랑한 여인 소우, 나를 친형처럼 따르던 까마귀, 모두 짐승처럼 비참하게 죽어갔다. 나 때문에, 오로지 내 곁에 있었다는 하나의 이유 때문에. 언제까지 이 끔찍한 삶을 계속할거냐.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 저주받은 삶을. 이제 끝내자! 떠나야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인간적 번민과 고뇌에 빠져있는 그를 깨워 일으킨 것은 그로 인해 아들을 잃은 까마귀의 엄마였다.
“이런 못난 화상을 살리려고 우리 아들이 목숨을 바친거여.”
엄마처럼 종아리 걷으라며 철썩철썩 때리면서 천민의 여인이 말한다.
“아파유? 봉황이 오기만 기다리다가 벌레처럼 죽어간 억조창생 민초들의 괴로움보다 더 아파유?”
그는 그 여인에게 큰 절을 하고 큰 은혜 입고 간다며 큰 힘을 얻고 떠난다. 그 이후 그는 또 한 번 변했다. 더 이상 운명에 끌려 다니지 않고 운명을 끌고 가는 인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여러 번 변화를 겪는 데 거기엔 언제나 민초와의 인연이 있었고, 그들이 보여준 진심을 경청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다.
인간관계 때문에, 삶 때문에 소란스러웠어도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배워 경청할 수 있는 사람, 조용히 누군가를 살필 수 있는 사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간곡히 무엇인가를 해본 사람, 간절한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 간절함이 만든 소망의 불씨를 지펴줄 수 있는 사람, 이현세 선생이 그려낸 단군 같은 사람, 그런 리더였으면 좋겠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