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 재판 항소심이 마무리되고 현대차 비자금 사건 재판 항소심도 종착역을 향해가면서 대기업 인사들의 검찰청사 출입도 한동안 뜸해질 것으로 관측됐다. 본격적인 대선 정국이 전개되고 있는 만큼 각종 선거법 위반 사례와 후보 간 고발에 따른 정치 사건들이 검찰청사 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 것이다. 최근 이명박 전 서울시장 캠프의 박근혜 전 대표 측 인사들에 대한 고소 과정에서 검찰청사 안팎이 들썩거린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대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검찰청사 포토라인이 정치권 인사들의 전유물이 될 것이란 관측이 ‘때 이른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대기업 관련 서류를 뒤적거리는 소리가 검찰청사 내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는 전언이다. 얼마 전 공개된 대형 건설사 비리 건은 재계를 향한 검찰의 활시위 끝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다.
최근 해외실적 호황으로 주식시장에서도 활황을 누리고 있는 한 대기업은 외환거래 비리 관련 내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다. 재계의 명망가가 오너인 모 대기업은 탈세 의혹을 받고 있는데 이 내사를 담당하는 수사팀이 최근 한 다단계업체 공금횡령과 탈세 건을 전담했던 곳이라 더욱 주목받는다. 적극적인 M&A를 통해 최근 몸집을 급격히 불려 중견기업 반열에 오른 업체 A 사와 B 사에 대한 비리 내사도 진행 중이라는 전언이다. 그밖에 시민단체가 재벌 2세의 이익 편취 등으로 고발한 업체들에 대한 내사 역시 진행 중이며 금융권 유력인사의 개인비리 건도 거론되고 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정치 시즌에 검찰의 주요 수사팀이 정치 관련자가 아닌 대기업들의 치부를 뒤쫓고 있는 것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수사당국이 범죄의혹이 있는 대상에 대해 내사를 벌여 범죄행위를 입증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므로 시점에 얽매어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검찰·법조계 안팎의 중론이다.
그러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시즌에 벌어지는 대기업 내사에 대한 시선이 모두 한결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일부 호사가들은 수사당국이 재벌 관련 내사에 달려드는 것을 두고 다양한 시각을 내놓는다. 특히 검찰과 현 정부 간의 묘한 알력다툼이 대기업 내사 배경에 깔려있다는 해석이 눈길을 끈다. 검찰의 수사력이 정치인들의 공방전에 집중될 것으로 판단한 정부가 기업에 대한 조사권한을 확대하려는 것을 검찰이 방관하지 않으려 한다는 시각이다. 정부 산하 기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의 수장인 권오승 위원장의 ‘공정위원장 부총리급 격상’ 발언이나 공정위의 최근 대형 건설사 담합 행위 적발에 이은 수백억 원 과징금 부과에 대한 검찰의 시선에 불쾌감이 서려있다는 것이다. 공정위의 행동 반경 확대에 대해 검찰 쪽에서 불편해 한다는 해석이다.
게다가 최근 정치권과 관가엔 정부 산하 기관이 적극적 M&A를 통해 지난 몇 년간 급격히 몸집을 불려 중견기업 반열에 오른 업체들을 내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그런데 이 업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검찰 내사 리스트에 올라있다. 공정위를 비롯한 정부 산하 기관과 검찰 사이에 기업 조사에 대한 자존심 경쟁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의 기업 수사가 비단 정부와의 미묘한 갈등기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여야의 대선후보 캠프엔 율사 출신 현직 의원들을 비롯해 판검사 경력의 인사들이 즐비한 상태다. 이들이 각 캠프의 이해관계에 따라 검찰에 직간접적인 압력 행사 시도에 나설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최근 이명박 전 시장 측의 고소취하 해프닝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정치시즌에 난무하는 각종 명예훼손 사건과 관련해 검찰 수사에 대한 논란도 빚어지기 마련이다. 정치권과 법조계의 여러 인사들은 “검찰이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권력에 초연하게 대처하려 노력하고 있다. 대기업에 대한 광범위한 내사는 검찰의 의지를 천명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 중 하나가 될 것”이라 평한다.
재벌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만 보더라도 대기업은 수사당국에게 정치권만큼이나 쉽사리 예봉을 들이대기 어려운 잡단으로 여겨져 왔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기업에 대한 수사당국의 성역 없는 수사 행보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수사당국이 대외 변수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 표출로 풀이될 수 있다.
일각에선 검찰이 기업을 강하게 몰아붙여 얻어낼 수 있는 반사이익에 주목하기도 한다. 최근 한화 김승연 회장 폭행 사건 수사과정에서 검찰은 장희곤 전 남대문경찰서장을 구속하는 등 경찰 고위 인사들의 책임을 강하게 추궁하고 있다. 이런 한화 사태 후폭풍을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와 결부지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검찰이 수사권 조정 문제 때문에 작정하고 경찰 조직을 휘젓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수사 과정을 통해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가 힘의 균형을 잃었다는 의견이 대체적이다. 경찰조직 안팎에서도 “향후 수년간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는 물 건너갔다”는 회의론까지 등장한 상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