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석 후보자는 1964년 5월 29일 서울 영등포구에서 태어났다. 김 후보자는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을 맡았다.
김 후보자는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수사기관은 이 사건 배후에 전학련이 있다고 지목했다. 의장인 김 후보자는 배후 조종 혐의로 5년 6월 실형을 받았다. 김 후보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 책임을 묻기 위해 미 문화원을 점거했다고 했다.
김 후보자는 1985년 수감됐다. 수감 생활 중인 1987년 작은형 김민화 씨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수형자가 특정 사유로 일정 기간 휴가를 얻는 ‘귀휴’ 조치를 받아 작은형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때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조문을 왔다. 김 후보자는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고 했다.
출소 후 운동권을 떠나 현실정치에 입문했다. 김 후보자는 2024년 10월 12일 광주 MBC 인터뷰에서 1987년 단일화에 실패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입장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군부 잔존 세력과 합당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자유당에 합류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3당 합당에 반대한 이들이 모여 있는 꼬마민주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꼬마민주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몸담은 당이었다. 꼬마민주당은 199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당과 합당한다.
김 후보자는 1992년 총선 때 영등포구을에 출마했다. 만 27세였다. 당시 김 후보자 캠프에 있었던 김원이 민주당 의원은 “잠깐 이야기하는데도 명쾌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며 “김민석이 떴다 그러면 모든 언론에서 집중했던 시절이었다. 어마어마했었다”고 기억했다. 김원이 의원은 지금의 ‘이준석 돌풍’은 ‘김민석 돌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낙선한 김 후보자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1996년에는 15대 총선에서 탤런트 최불암 씨와 맞붙었다. 이번에는 김 후보자가 이겼다. 32세 최연소 국회의원의 탄생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 후보자를 각별히 여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후보자는 당선 이후 인기 상임위인 재정위원회부터 총재 비서실장까지 요직을 두루 맡았다. 1997년 한보그룹 청문회 때 날카로운 질의로 주목을 받았다. 이 청문회는 한보그룹의 부실 대출과 정치권 로비 등 각종 비리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열렸다.
김 후보자는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등 범야권 연합체인 새천년민주당 창당 작업에 관여했다. 이때 재야인사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한다. 당시 우상호 민정수석, 이인영 의원, 임종석 전 비서실장 등이 합류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86세대(80학번, 1960년대생) 대표 주자로 발돋움한 순간이었다.
#2002년 지방선거 기점 추락
승승장구하던 김 후보자는 2002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추락했다. 당시 김 후보자는 당내 대선후보 여론조사 2위에 오를 정도로 입지가 커진 상태였다. 이러한 인지도를 등에 업고 만 38세 나이로 서울시장에 도전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김 후보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9.26%포인트(p) 차이로 패했다. 당시 최규선 게이트로 김대중 전 대통령 막내아들 김홍걸 전 의원이 구속된 여파가 컸다. 그러나 인지도가 높은 김민석 후보자도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문제의 ‘후단협 사태’가 터졌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 저자세를 보였다. 1989년 일본 출장 때 받은 시계도 보여줬다. 이른바 ‘YS시계사건’이다. 그러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됐다. 3당 합당을 비판하고, 3김 시대 청산을 외치는 노 전 대통령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노 전 대통령 입지가 흔들리자 당시 여권 내부에서는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를 추진하는 세력이 생겼다. 당내에서는 노 전 대통령에게 선거자금을 가져오라는 압박도 거세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 후보자는 정몽준 캠프에 합류했다. 이때 철새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노무현을사랑하는모임(노사모)’를 비롯한 친노계의 반감을 샀다.
김 후보자는 이회창 후보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단일화가 필요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정치권 관계자는 “(후단협 시기에) ‘노통(노 전 대통령)’이 시당에 갔다가 오더니 막 화가 나서 소주 한 잔 들이켜시더니 ‘이 나쁜 놈들’이라 하셨다”고 기억했다. 이 관계자는 “(김 후보자는) 후단협 측 선봉장이었다. 국민 참여 경선으로 해서 온 국민이 뽑은 자당 후보를 단일화하라고 했다”며 “우리가 봤을 때 정몽준이 돈이 많으니까 (돈) 보고 한다고밖에 생각이 안 들었다. 무슨 철학이 있나”라고 비판했다.
후단협 사태 이후 김 후보자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2007년 대선에서는 경선 탈락했다. 2010년에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가 확정돼 2015년까지 피선거권이 박탈됐다. 김 후보자는 2008년 지인 3명으로부터 총 7억 2000만 원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당시 수사 검사는 윤갑근 변호사였다. 김 후보자는 2002년 SK그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2015년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전력이 있다.
#극적 부활부터 총리 지명까지
김 후보자는 정계를 떠났다. 칭화대 법학석사, 뉴저지 주립 럿거스대 로스쿨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5년 복권되자 ‘민주당’ 대표 자리를 맡았다. 2016년 민주당은 더불어민주당과 합당했다. 이후 민주연구원장, 문재인 대통령 후보 종합상황본부장, 포용국가비전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2002년 국회를 떠난 이후 18년 만에 복귀에 성공했다.
2022년 20대 대선에서는 이재명 후보 선대위 전략기획본부장을 맡으며 친명계로 거듭났다. 이재명 1기 지도부에서는 정책위의장을 맡았다. 체포동의안 표결 때는 이 대통령을 적극 엄호했다. 21대 총선에서는 상황실장 임무를 수행했다.
2024년 8월부터는 비상계엄 선포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당초 이 발언은 음모론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사실로 입증됐다. 이후 집권플랜본부를 이끌며 먹사니즘, K-이니셔티브 등을 준비했다. 21대 대선에서는 선대위 상임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이 대통령은 김 후보자의 책 ‘이재명에 관하여’ 추천사에서 “든든하게 함께 걸어준 동지이자 친구”라고 적었다.

6월 13일 국회는 국무총리 인사청문특위(위원장 이종배)를 꾸렸다. 의석수에 따라 민주당 7명, 국민의힘 5명, 비교섭단체 1명으로 구성됐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주를 이룬다. 야당인 국민의힘이 당권을 두고 사분오열하는 등 제대로 청문회를 치를 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김 후보자의 ‘반미’ 이력과 불법 정치자금 문제를 공략한다는 방침이다. 2008년 김 후보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강 아무개 씨로부터 빌린 돈 4000만 원도 검증 대상이다. 김 후보자가 아들의 스펙 쌓기에 관여한 정황들도 드러났다. 아들이 몸담은 고교 동아리가 제안한 법안 공동 발의자에 김 후보자의 이름이 있었다. 국민의힘은 이를 ‘아빠 찬스’로 의심한다. 약 2억 원의 재산을 보유한 김 후보자가 아들의 미국 유학비용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