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삼성이건희장학재단. 연합뉴스 | ||
‘5%.’
현재 공익법인이 동일기업의 주식을 취득·보유할 때 상속·증여세 납부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다. 5% 미만이면 안 내고 5% 초과면 내야 한다. 또 5%를 초과해 출연하려는 출연자는 그 주식을 처분해서 현금으로 출연하거나 다른 주식으로 대체해야 한다. 이 기준은 1993년 말 상속세법이 개정되면서 도입됐다. 그 전까지는 20%였지만 재벌 총수 일가가 공익재단에 지분을 넘겨 상속증여세를 내지 않고 계열사를 지배하는 데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20%.’
이번에 한국조세연구원(조세연구원)이 완화안으로 제안한 수치. 정부의 지출만으로는 공익사업의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익법인의 활성화가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기업들이 주식 형태로 돈을 낼 수 있도록 만들어주자는 취지다. 이제 지주회사제도도 도입되는 등 시대상황도 변했으니 세금을 왕창 얻어맞는 상속·증여보다는 사회환원을 통해 가문의 명예도 높이고 절세효과도 주는 카드로 기부를 활성화시키자는 것.
‘5%룰’ 하에선 5% 넘게 출연하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이를 주식시장에 팔면 그 기업은 M&A에 노출되기 쉽다. 이를 20%로 늘려놓으면 ‘유사시’ 우호지분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얘기. “투명한 관리만 확보된다면 국가경제적으로도 바람직하다”고까지 설명한다.
조세연구원은 이런 안이 실현되려면 공익법인의 투명성 제고가 전제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전용계좌 도입, 공시제도의 충실한 이행, 외부감사 이행 등의 제도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런 논거에 대해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연대)는 16일 ‘공익재단 통한 부의 편법상속 다시 길 터주려는가’라는 논평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M&A시 우호지분 역할 주장”이라며 “언제부터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수단 마련이 상속증여세법 개정에서 고려할 사항이 되었는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18일에는 참여연대도 ‘공익재단을 재벌의 편법 상속 통로로 만드려는가’라는 논평을 내며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참여연대는 ‘옛날 얘기’까지 꺼내며 삼성을 타깃으로 삼았다. 이병철 창업주가 이건희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때 삼성의 공익법인들(삼성문화재단 삼성공제회)이 지분을 중개했다는 것. 연대는 “1987년 그룹 회장직 승계가 이뤄지기 10년 전인 1977년 후계자를 발표했고 그 때부터 이병철 회장이 공익법인에 주식을 이전하고 공익법인이 다시 이건희 회장에게 주식을 되파는 방식으로 상속세를 내지 않고 경영권을 세습했다”고 밝혔다.
연대는 또 재벌총수나 전직 임원들이 재단이사회에 관여하고 계열사로부터 매년 출연금을 받는 상황에서 공익법인의 독립성은 언감생심이라며 삼성의 예를 들었다. 지난해 삼성그룹이 8000억 원 사회헌납을 발표하면서 삼성과 독립된 삼성이건희장학재단이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으로 탈바꿈한 사건은 재벌 출연 공익법인의 현주소라는 것.
이렇듯 삼성이 타깃이 되는 이유는 오너 지분이 취약한 삼성이 현재 금산법 개정 등으로 지배구조 개편에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연 공익법인들이 계열사 주식을 고르게 보유하고 있어 20%안이 확정되면 가장 큰 혜택을 입는다는 계산도 깔린 듯하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은 삼성에버랜드다. 현재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이 보유한 에버랜드 지분 4.12%는 지난 5월 삼성이 고 이윤형 씨 몫을 사회환원 차원에서 넘긴 것. 삼성은 당시 윤형 씨 지분 전부(8.37%)를 장학재단에 넘기려다 ‘공익법인 5%룰’ 때문에 나머지 4.25%는 교육부에 기탁했다. 그런데 최근 교육부는 이 지분을 11월까지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으로선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우호지분 4.25%를 잃어버리게 됐다.
만약 지분을 넘길 당시 조세연구원의 안대로 5%가 아니라 20%였다면 삼성은 윤형 씨 지분 전체를 장학재단에 기탁했을 것이고 이는 역시 삼성의 우호지분으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반대로 경제개혁연대의 지적처럼 이 지분은 삼성가의 경영권승계에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양날의 칼’인 셈이다.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은 에버랜드 외에도 삼성전자(0.25%) 삼성네트웍스(2.81%) 삼성SDS(4.57%)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때문에 지난해 일각에선 ‘이건희 장학재단이 삼성의 새 지주회사가 될 것’이란 전망마저 나왔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2004년부터 당시까지 이사로 재직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이 부담스러웠던지 이 전무는 지난해 9월 ‘고른기회’로 탈바꿈하면서 해임됐다.
장학재단 이외에 다른 공익재단들의 삼성 계열사 보유 지분도 만만치 않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지난해 말 고 이종기 전 회장의 지분을 증여받아 삼성생명 지분 4.68%를 확보했다. 삼성문화재단도 4.68%를 보유해 대주주 명부에 올라 있다. 두 재단의 지분율을 합하면 9.36%. 이건희 회장(4.54%)의 두 배에 가깝다. 에버랜드와 함께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큰 축인 삼성생명도 공익법인에 기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 계열사 그리고 임원들의 지분, 그리고 삼성의 공익법인이 가진 지분을 모두 합하면 지분율은 35.62%다. 삼성문화재단은 삼성생명 지분 외에도 삼성에버랜드(0.88%) 삼성전자(0.02%) 삼성물산(0.08%) 삼성화재(2.97%) 지분도 갖고 있다.
정부는 ‘20%안’ 등 조세연구원의 제안에 대해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다음달 중 최종안을 확정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재정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조세연구원 주최로 토론회를 한 것일 뿐 아직 일정은 확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5%와 20%의 엄청나게 커 보이는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가 조세연구원에서 시작됐다는 사실 자체에 의의를 두기도 한다. 언제 실현될지는 모르지만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재계의 파상 공세가 이어질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